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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지 Oct 19. 2023

손질된 생선은 소중하니까.

기차역 나오는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부모님이 나오시길 기다린다. 먼발치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이자 신이 난 아이들은 발을 동동거리며 달려가고, 난 자연스레 어머님 아버님 손 쪽으로 눈이 간다. 이번도 어김없다. 아버님은 노끈을 질끈 여민 아이스박스, 어머님은 정원을 초과한 상추가 쑥쑥이 고개를 내민 대형 장바구니를 들고 계신다.


"아우 엄니, 무거운데 이런 거 왜 갖고 오셨어요~~"

"뭐이 갖고 온 게 있다 그래. 집에 나는 거 좀 뽑아온 게 다구만."


10년 차 며느리의 뻔한(?) 멘트에도 쿨하게 넘기시는 어머님. 아버님께도 같은 멘트를 남겨드리곤 어머님의 장바구니를 쥐어든다.  넘겨달라는 내 말에 무겁다고 손사래 치시는 어머니와 결국은 사이좋게 한 쪽씩 나눠 들고는 주차장으로 향한다.


집에 와 보석상자를 여는 여자처럼 과한 호들갑을 장착하며 장바구니를 열어보았다. 새벽이슬을 여적지 머금고 있는 상추와 언제 봐도 기분 좋은 보랏빛 가지가 메인이다. 그 곁에는 오이 세 개, 호박 두 개, 고추 세 개. 그리고 이름 모를 묘한 녀석이 한 무더기 다. 장바구니의 크기는 정해져 있고, 그 안에 어머님이 키우신 것들은 최대한 넣어주고 싶으셨던 어머님의 마음이 귀여웁게 느껴졌다고 말하면 나는 너무 건방진 며느리가 되는 걸까?


초록초록한 아이들이 정말 예쁘다.
'차요테'라는 낯선 이름의 채소.

얼핏 열대야 과일같이 생겨서 날 슬쩍 기대케 했던 녀석의 이름은 '차요테'. 어머님도 올해 처음 키워 보신 건데, 아직 작긴해도 맛보여주고파 처음 딴 놈들을 갖고오셨단다. 맛도 궁금하고 리액션도 중요하니 냅다 칼을 들고 꼬투리를 잘라내 본다. 무같기도 오이 같기도 한 첫인상을 뒤로하고 한 입 베어보니, 오!


콜라비가 생각나지만 더 부드럽고 오이처럼 이 채소 특유의 향이 나는, 매력적인 녀석이다. 맛있다고 몇 조각 베어무니 어머님 입가에 미소가 번지신다. 예쓰, 성공이다. 그리고 뭣보다 진짜 맛있다.


장바구니가 끝나고 다음은 아이스박스다.


"느그 삼촌이 너네 집 간다니까 갖다주라고 새벽에 낚은 거 갖다주드라."


오, 갈치인가? 고등어인가? 용치인가?


이번엔 무슨 생선일까 기대하는 티를 팍팍 내면서 박스를 여니 영롱한 푸른 등을 내게 떠억 내보이며 생물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이는 거대한 생선들이 대거 등장한다. 삼치란다. 우와 소리를 연발하며 "어머니 저 사진 좀 찍을래요!" 한 마디 외치곤 곧장 구도 잡기에 들어간다. 아이스박스 정리는 일시정지다.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는데



역시 난 안 되겠다. 생물의 영롱함을 드러내기는커녕 왜 더 피곤해 보이는 삼치더미를 만드는 똥손.


"어머니, 사진이 잘 안 찍혀요. 이 영롱함이 안 보여서 속상해요~~"


입을 쭉 내밀고 퉁퉁거리니 어머님이 또 웃으신다. '나 오늘 어머님께 플러팅 대성공 느낌인데!'라고 혼자 뿌듯한 마음 간직하며 다시 정리에 들어가는데 문득 삼치가 손질되어 있는 게 보인다. 그제사 아까 흘려들었던 어머님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간을 해놓은 거라 그냥 바로 구워 먹으면 돼."


어머님의 택배가 부담스러웠다. 요리는커녕 집밥도 잘 안 해 먹는 맞벌이 신혼부부에게 고구마 박스나 온갖 생선이 가득한 아이스박스는 원치 않는 선물을 매번 받아 쌓아 놓는 느낌이었다. 고구마 한 박스를 베란다에 겨우내 뒀다 한 박스를 모두 썩혀 버린 적도 있었고, 특히나 내가 좋아하지 않는 생선은 냉동실을 청소할 때마다 음식물 쓰레기로 직행하기 일쑤였다.


어쩌면 택배 속 내용물이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시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시작한 신혼은, 내가 먹고사는 데 있어 아무 지장이 없음에도 철없는 내겐 '전문직 여성이 능력 없는 집안으로 시집갔다'는 스스로 만들어낸 꽤나 큰 자격지심이자 '그러니 남편은 무조건 내게 맞추고 살아야 한다'는 오만함의 근원이었다. '돈이나 챙겨주지, 왜 먹지도 않을 것만 이렇게 많이 보내시는 거야.'라는 속내가 그 박스들 속 음식을 이미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그렇게 시부모님을 '넉넉지 못하고, 시골살이밖에 모르는 답답한 어른들'이라 결정지어버리곤 그런 어른들로 대했다.


해가 지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나름의 연륜이 생기며 처음의 오만함은 사라졌지만 어머님이 보내주시는 택배에 대해선 여전히 부담이 남아있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님이 보내주시는 택배 안 생선들을 다 먹을 자신이 없어 가까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생선을 받아가신 한 분이 내게 이렇게 톡을 보내오셨다.


진짜 사랑받으시나 봐요~~

이렇게 손질을 다 해서 보내주시다니요~~

혹시나 며느리 고생할까 봐

다 손질해서 간까지 해서 보내시네~~

그만큼 어머님께 잘해서이겠죠?

두 분 다 서로 복 받으셨네요~~

저도 그 덕분에 맛난 생선 편히 먹어요~~


생선이 손질을 하는 거였구나. 몰랐다. 매번 머리도 내장도 비늘도 없는 그런 생선만 보아온지라 모든 생선을 그렇게 바로 먹는 건 줄 알았다. 생선 굽는 건 자신이 더 잘한다며 늘 남편이 구웠고, 가끔 마트에서 생선을 사도 그걸 꺼내 식탁에까지 올리는 건 오롯이 남편 몫이었기에 내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순간, 그동안 내가 버리고 처리한 숱한 생선들의 잔상이 되감기는 필름처럼 쉼 없이 돌아갔다. 그 필름 사이에 처음으로 처연한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이렇게 오만하고 무식했다니. 이런 오만한 무식으로 감히 그 어른들을 평가하고 살았다는 생각은 그날 밤늦게까지 내 머리를 맴돌았다.


간을 했다는 어머님 말씀에 용감하게도 날생선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입에 넣어본다. 기분 좋은 짠맛이 난다.


"간이 되어 있으니까 꼭 잊지 않고 소금 안 칠게요!"


삼치를 두 마리씩 소분해 보관하고 그 외 냉동상태로 온 용치, 돼지고기, 떡갈비 등도 냉동실에 넣으니 한동안 휑했던 냉동실이 제법 구색을 갖췄다. 야채까지 야채칸과 냉장실에 차곡차곡 보관하고 나니 마음이 든든해진다.


"어머니, 진짜 든든해요. 너무 좋다!"

"그르냐? 난 또 느그 근처서 언제든 살 수 있는 채소 굳이 가져가는 거 안 싫어하려나 했는데... 그래도 내가 좀 갖다 주는 게 낫지 싶어서."

"완전 다르죠! 그리고 요즘 물가 너무 비싸서 채소도 못 사 먹어요. 어머님 덕분에 가지 실컷 먹겠어요."

"그래. 그 가지 적당히 썰어서 그냥 구워만 먹어도 맛있드라. 그렇게 먹어. 생선도 잘 구워 먹고."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말투가 매력이신 어머님의 안심한 웃음을 보니 기분이 좋다. 효부는 못되지만, 적어도 어머님이 보내주신 것들은, 그중에서도 생선은 기필코 맛나게 다 먹으리. 먹을 때마다 손주들 앞세운 인증샷 잊지 말고!


손질된 생선은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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