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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17. 2022

당신이 미워 나는 나쁜 딸이길 선택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 3년을 가득 채워 회사생활을 했다. 진급을 했고 50만 원이나 오른 월급을 보고 살짝 고민했지만, 돈 말고는 얻는 게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퇴사를 결정했다. 그렇게 3년의 마무리를 자축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엄마와 함께 패키지 유럽 여행을 떠났다.


스페인의 한 음식점, 여행을 함께 하게 된 여행객들은 원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맞은편에 앉은 중년여성 셋은 정기적으로 해외여행을 다니는 친구사이인 듯했다. '우리 아들이 이번에 의사면허를 취득했고, 우리 딸이 이번에 유학하고 돌아왔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여유있는 사람들이구나 짐작했다. 그들에게 고정관념이 생겨버린 탓인지, 그들의 말과 행동은 침착했고, 여유있었고, 우아했고, 고상해 보였다.


그리고 음식을 챙겨 내 옆자리에 자리한 엄마. 언제 또 스페인에 와서 이런 음식을 먹어보겠냐는 듯한 태도로, 이럴 때 많이 먹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나를 챙기고 엄마를 챙기느라 분주해 보였다. 맞은편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우아하고 여유 있음과 달리 엄마에게서 느껴지는 조급함이 순간 나의 열등감을 자극했고,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나는 적당히 먹으라는 말로 엄마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 순간 1초 찰나, 엄마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내 말이 칼이 되어 엄마 가슴에 꽂힌 듯, '나 상처받았어.' 하는 표정. 엄마는 입에 있던 음식을 꿀꺽 삼켰고 상처받은 표정까지 삼켜버린 채, 음식 먹는 것을 이어갔다.


여행객 중 우리 말고 또 다른 모녀가 있었다. 평생 농사일만 하며 고생한 엄마에게 효도를 하고자 40대 딸은 최근 해외 이곳저곳을 엄마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평생 농사일을 한 60대 엄마는 체력에 부쳐 여행하는 것을 버거워하는 듯했다. 여행 내내, 엄마는 그 60대 엄마가 마음에 쓰였는지 잘 걷고 있는지, 힘들어하고 있진 않는지 수시로 걱정했고, 그들에게 살갑게 말동무가 되어주는 엄마였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장시간 여행으로 모든 사람들이 지쳐있었다. 40대, 60대 모녀가 우리 옆자리에 앉았는데, 60대 엄마가 다리 뻗고 갈 수 있도록 엄마는 자신의 편한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내보이는 엄마를 보며 알 수 없는 혼란을 느꼈다.


엄마라는 사람을 몇 마디 말로 정의 내릴 수 없다. 내가 경험한 엄마는 '엄마'의 모습만 있으니까. 그래도 되돌아보면 엄마는 '착하고 여린 사람'에 속했다. 이기적이고 못되고 약아빠진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엄마는 분명 '착한 사람'에 속했다. 호되게 시집살이를 시킨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돌아가셨을 때 애잔함을 감추지 못하던 엄마였고, 고생한다며 아파트 경비 아저씨에게 음식을 나눠주던 엄마였고, 집에 무언가를 수리하러 온 정비공들에게 수고한다며 음료 한잔을 건네던 엄마였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엄마는 '고맙다', '서운하다' 같은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엄마였고, 대화를 하다 보면  마음속에 벽을 만들어내는 엄마였고, 수시로 말로 내게 상처를 입히던 엄마였다. 그래서 사랑해야 마땅한 나의 엄마라는 사람을 나는 자주, 종종, 어쩌면 매일 미워했다. 가끔  마음이 괴로울 때면 엄마에게  흘리는 상처를 주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런   없는 혼란을 느끼며,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나는 나쁜 딸로 자라 갔다.


주위 사람들은 엄마에게 잘해야 한다고, 효도해야 한다고 내 손을 붙잡고 일러주었다. 나 역시 어린 나이에 우리를 낳고 기르느라 고생한 엄마의 삶을 알기에 좋은 일이 생기면 엄마에게 먼저 알렸고, 멋진 여행지를 가면 '엄마랑 나중에 다시 와야지.'하고 생각했다.


나쁜 딸이었던 나를 반성하고 용기를 내 엄마에게 한 발짝 다가가면, 엄마의 말은 여전히 나를 찔렀다. 찔림에 아파 흠칫 뒤로 물러섰고, 엄마에게 멀어진 내가 또다시 나쁜 딸이 된 것 같아 자책했다. 다가서고 물러서고 다가서고 물러서고를 반복했다. 다독이고 상처받고 다독이고 상처받고를 반복했다. 그 언저리에서 다가서지도 멀어지지도 못하며 그렇게 엄마와의 거리를 지켜나갔다.  


그러다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 물리적 독립을 했다. 집밥이 그리웠지만, 정서적으로 편안했다. 말에 상처받지 않아도 되었고, 부정적인 감정에 영향받아 우울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만의 정서적 바운더리가 굳건히 생긴 것이 기뻤다. 이렇게 따로 사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겠구나 생각했다. 엄마 삶 따로, 내 삶 따로 이렇게 살면 문제없겠구나 마음 놓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집에 가서 마주한 엄마를 보며, '나는 나쁜 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전과 다르게 확확 늙어가는 엄마의 모습이, 점점 왜소해져 가는 엄마의 모습이, 엄마 삶의 유한성이 내 가슴을 울렸다.


애증, 사랑하지만 미워할 수밖에 없는 마음. 덕지덕지 붙은 엄마에 대한 감정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있다. 떼낸 자국이 아물어가는 것을 보며, 이전보다 확연히 명료해져 가고 굳건해져 간다. 세상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이 양가적인 마음이 참 괴로웠다. 힘들었다. 그리고 가장 무섭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저 사랑만 하며 살 수는 없는 걸까. 앞으로 남은 내 삶의 가장 큰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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