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재 게임 혹은 죄수의 딜레마
레딧에 재미있는 포스트가 올라왔다. 위 그림은 그 포스트의 핵심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다.
예방 접종은 최근 선진국에서 주기적으로 부상하는 이슈다. 선진국에서 이런 이슈가 부상하는 게 이상해 보이지만 슬프게도 사실이다. 국가주의의 공기 속에 자랐던 세대에게 예방 접종은 불주사로 기억될 것이다. 불주사뿐 아니라 "국민학교"를 경험한 사람에게 학교에서 집단적으로 실시하는 예방 접종은 흔한 일상이었다. 사이비 과학자들이 예방 접종의 후유증으로 여러 가지 질병을 지적한 이래, 이런 허위 과학이 질병처럼 퍼지고 있는 셈이다.
왜 예방 접종을 하는 것이 필요할까? 개체의 비용과 편익의 관점에서 먼저 생각해보자. 경제학자의 출발점은 항상 냉혹하게 계산하는 고독한 호모 이코노미쿠스이니까. 100명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100명 중 99명이 예방 접종을 마쳤다. 그리고 이제 예방 접종을 고민하는 남은 단 한 명이 나다. 예방 접종을 하면, 내가 병에 걸릴 확률은 0이다. (꼭 그렇지 않지만 편의상 그렇다고 해두자.) 이게 예방 접종의 편익이다. 비용은? 주사 값 그리고 몹시 낮은 확률로 존재하게 될 부작용이 있을 것이다. 반면, 예방 접종을 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99명이 모두 예방 접종을 했으므로 접촉을 통해서 감염될 가능성은 0이다. 그리고 접종을 하지 않으면 부작용을 피할 수 있다. 이득과 편익을 따져보면, 예방 접종을 하지 않는 것이 이익이다.
이것과 비슷한 구조를 지닌 게임이 이른바 공공재 게임이다. 모두가 일정한 비용을 들여 공공 이익에 기여하면 개인이 들인 비용(개인의 기여분)에 비해 더 큰 이득으로 개인에게 돌아온다. 단 게임에 참가하는 다수가 기여한다는 전제 하에서 나만 빠지만 내가 누리는 이익이 가장 클 수 있다. 즉 다른 이의 기여를 통한 혜택은 누리되 자신은 비용을 들이지 않음으로써 가장 큰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남들이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 아래에서) 행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공공재는 형성되지 않는다. 예방 접종을 하는 이들의 숫자는 매우 적은 수에 머무를 것이다.
공공재 게임을 기억하면서 저 애니메이션을 따라서 약간 현실이라는 양념을 쳐보자.
우리가 속한 인구에는 예방 접종을 아예 할 수 없는 구성원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신생아, 산모 혹은 화학치료 중에 있는 암환자가 있다. 이들은 예방 접종이 불가능하다.
앞서의 논리는 99명이 모두 예방 접종을 마쳤을 때, 라는 가정이다.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접촉하는 사람들이 예방 접종을 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접종이 가능한 사람들의 비율이 조금만 낮아지더라도 질병의 확산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위의 애니메이션에서 접종률 90%, 75%를 주목해서 보자. 둘의 접종률은 15%에 불과하지만 90%의 경우 질병의 확산이 제한되지만, 75%의 경우에는 질병의 확산을 막기 어렵다. 일정한 분기점을 기준으로 어떤 상태가 질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경우, 이 분기점을 임계치(critical mass)라고 부른다. 임계치를 기준으로 전혀 다른 상태를 나타내는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 사이의 접촉이 특정한 형태의 연결망(네트워크) 구조를 띠고 있을 때 자주 관찰된다.
다시 경제학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보자. 여러 가지 이유로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을 '자유'를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결국 병에 걸리면 내가 책임지겠다, 라는 게 그들의 주장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접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내가 접종을 하지 않아서 질병의 확산을 막을 수 없는 임계치에 접근한다면 나의 선택이 가져오는 손해는 나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외부성(externality)이라고 부른다.
외부성이 존재할 때 가장 표준적인 경제학적 해법은 무엇일까? 다양한 해법이 있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해결책은 국가의 개입이다. 그렇다. 우리가 국민학교 시절 맞았던 강제 접종은 전체주의적이었지만 외부성을 해결하는 합리적인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바늘을 아끼느라고 불로 바늘을 지졌던 대목은 제외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