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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뮈 Jan 12. 2024

1월의 질문

1월의 질문 


왜 나는 극단 서울공장 <두 메데아> 공연 보이콧 연명을 망설였는가


-처음 보이콧 성명서를 읽었을 때, 나는 뚜렷하게 분노와 답답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바로 연명한다는 실천으로 잇지 못했다. 며칠을 이 상황에 대해서 끼적여봤지만 뚜렷한 해답을 찾지 못했고, 또다시 글을 쓰면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우리 사회는 많은 영역에서 남성이 권력의 우위에 있는 상황이므로, 대부분의 성범죄 가해자를 으레 남성으로 가정하게 된다. 이는 경험으로 쌓아온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최근에 건너 듣게 된  '어떤'사건은 남성=가해자라는 높은 확률의 데이터로 인한 잠재적 편견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아찔한 경험이었다.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사건을 말로 나르는 것도 누군가에게 위해가 될 수 있었다. '안다'라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말을 전하거나, 가치가 투영된 행동을 하는 게 조심스러워졌다. 



물론 공연 보이콧 사건은 최근에 있던 일과는 다른 성질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 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고 싶었다. 그런데, 성추행 또는 폭행을 비롯한 피해자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확인받을 수 있지? 확인받으려고 하는 건 합당한가? 그리고 누구로부터, 어디에서 온 정보를 믿을 수 있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다른 자아로 느껴질 만큼의 혼란이었다. 공공의 목소리로 힘을 보탤 때, 스스로 검열하고 의심하고 있는 건가? 스스로의 자격을 의심하나? 어느 정도의 신중함이어야 충분할까?

권력을 더 쥐고 있는 사람을 의심하고, 덜 가지고 있는 자들에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믿음은 굳건하다. 그런데  굳건한 결론으로 향하는 회로를 섬세하게 언어로, 나의 확실한 말로 풀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의혹과 정황은 분명 하나, 법정에서 '혐의 없음'으로 정해진 성범죄의 경우는 어떨까. 

개인의 자유와 별개로 공공기관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했어야 하는 걸까? 서울문화재단 지원사업에는 성희롱성폭력 예방 서약서 작성과 의무교육이 필수로 들어가 있다. 제도와 현실이 어그러져 있는 모양새다. 공공극장의 가치와 방향의 부재도 지금 사건의 한 축을 이루는 원인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금 더 쩨쩨한 소시민으로 쿼드 내부에 있는 사람에 이입해서 상상해 보자면, 본인들이 그런 결정을 할 자격에 대한 물음이 있었을 것 같다. 결정구조에 대한 문제 그리고 권위적으로 닫힌 구조 안에서의 한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공공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 조직을 대표하고 책임지고 있는지 지독한 회의가 든다. 밥벌이와 보신주의를 또 이야기해야만 할까(여담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여담으로 극장뿐 아니라 심지어 지역에 스포츠 센터도, 구청에 작은  부서들까지 우리 생활에 연결된 모든 행정영역들이 모두가 나쁜 모양으로 닮았다.) 



아주 섬세하고 긴 토론이 필요한 주제다. 연극뿐 아니라 영화, 음악 등 모든 문화의 영역으로 확장해서 질문해도 어색하지 않다.


1. 성범죄자가 참여하는 예술작업은 어떤 식으로 보이콧되어야 하는가?


2. 법의 영역에서 처벌받지 않았지만, 성범죄를 방조한 예술인에 대한 창작도 보이콧해야 하는가? 


3. 공공 공간/ 공공 기금 등 공공의 영역은 어디까지이며, 성범죄자 혹은 성범죄 방조자에 제재는 어떤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하는가?



또 어떤 다른 질문이 필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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