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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Apr 25. 2020

바깥의 말이 우리에게 주는 것

허새로미의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을 읽고


"삐졌냐" 말을 마지막으로 들은  스물아홉 살의 어느 날, 내게는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어떤 일에 대해 회사 선배에게 화를  뒤였다. 삐졌냐는 말은  마법과도 같아서 갑자기 사건의 본질은     없이 사라지고 나의 분노는 한순간 하찮아졌다. 익숙한 경험이었다. 내가 상대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하고자 할 때 어떤 이들은  말의 무게를 깎아내리고 입을 다물게 만들기 위해  말을 썼고 자주 성공했다.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여  이상 만만하지만은 않은 상대가 되고서야  말은  일상에서 사라졌다.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을 읽는 동안 그렇게 말의 길이 끊기고 홀로 속앓이 했던 기억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중에는   똑똑해서 좋겠다 어른의 비아냥을 듣고 있는 십대 시절의 어떤 순간도 있었다. 그가 내게 “고맙습니다. 똑똑해서 좋아요라는 대답을 듣기 위해  말을  것은 아닐 . 그는 다만 성인 남성인 자신에게 ‘ 주지 않는어린 여자가 이제 그만 입을 다물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저렇게 표현했을 테. 그런  같지도 않은 말들 때문에 그냥 삼켜 버린 말들, 정당한 이름을 얻지 못한  상대의 마음대로 왜곡된 마음과 경험들, 때때로 스스로에게조차 외면당한 목소리들이 나의 삶에  얼마나 많을까. 또한 그로 인해  삶은 얼마나 위축되었을까. “상상할  있는 모든 종류의 위계를  미세한 언어의 눈금으로 구분할  있다 한국어,  “언어가 닦아놓은  걸으면서 이런 경험을   이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허새로미 지음,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눈치 없고 질문 많은 아이였던 이 책의 저자에게도 모국어로 이루어진 세상은 마냥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상대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도 눈치껏 읽어 내야 하고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한없이 말끝이 길어지는 한국어의 세계에선 “위계가 낮을수록 더 치열하게 치러야 하는 전투”가 많다. 말이란 게 참 힘이 없다 느껴지는 순간도 많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새삼 말이 얼마나 힘이 센지를 절실히 깨닫는다. 언어가 내게 있었던 일에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내가 그 일을 인식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언어를 가진다는 건 내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렌즈를 가지는 일이 된다. 이 책의 저자에게 그 렌즈는 영어였다. 


그녀는 영어라는 바깥의 말로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하면서야 모국어가 만든 세계를 비로소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손찌검’이라는 말이 가해의 심각성을 덮으면서 피해자가 당한 폭행의 경험을 흐려 놓는다는 걸, ‘드세다’는 말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약자를 향해서만 쓰이는 권력차가 전제된 말이라는 걸 깨닫는 일이며, 우리가 얼마나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짜증난다’, ‘기분이 나쁘다’, ‘억울하다’ 같은 커다란 말로 대충 얼버무리면서 자기도 모르겠는 자기 마음을 타인에게 휘두르며 사는지를 돌아보는 일이다. 납득할 수 없고 흐릿하던 세상은 그녀에게 그렇게 조금씩 명징해졌다. 그리고 낯선 말들을 빌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정확한 이름들을 붙이면서 그녀는 다른 세상을 만났고 스스로를 재발명할 수 있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나는 영어 같은 외국어를 통해서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경험은 해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게도 외국어는 아니지만 ‘바깥의 말’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만난 경험은 있다. 예컨대 나에겐 그 바깥의 말이 나이나 직책과 상관없이 맺어 본 평등한 말하기의 경험이었고, 남성들이 만든 언어로 가득한 내 세상에 다른 언어를 가져다 준 페미니즘이었고, 나이를 기준으로 인간의 위계를 만들고 삶을 제약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의 목소리였다. 나를 괴롭히는 지금 이곳의 말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 주는 언어들을 통해서 나는 스스로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고, 나의 경험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었고, 나를 위협하지 않는 안전한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저자에겐 그 다른 언어가 영어였지만 우리가 빌려올 수 있는 바깥의 말이 외국어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곳의 말들이 영 내 편인 것 같지 않은 이들, 지금 이곳의 말들이 만들어 주는 관계의 모습이 너무 불평등하다고 느껴지는 이들이라면 우리의 언어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위계의식과 가부장성, 편견을 낯설게 바라보게 해 줄 수 있는 언어 모두를 그 바깥의 말의 자리에 둘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일이 한국어에 아직 나 있지 않은 길, 아직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길에 발자국을 보태며 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다르게 말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다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거듭 확인한다.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당돌하다고 말하길 멈출 때 멈춰지는 건 단지 그 말만이 아니다. "남을 드세다, 당돌하다, 맹랑하다고 부를 정도의 권력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도 함께 멈춘다. 그런 마음으로 요즘 딸에게 건네는 말들을 조금씩 바꾸려 노력하고 있다. “효녀네” 하는 감탄 대신 “고마워”라고 말하려 노력한다. 딸이 뽀뽀를 해줄 때 “애교가 넘쳐”라는 말 대신 “너무 다정하다”라고 말하려 노력한다. 효도나 애교와 달리 고맙다는 말, 다정하다는 말은 딸 역시 나에게 돌려줄 수 있는 말이자, 서로 평등하게 주고받기가 가능한 태도이므로. 그렇게 익숙한 말들을 하나씩 다른 말로 바꿔 가다 보면 지금보다 훨씬 나란한 높이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풍경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이래 놓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화를 내는 딸에게 또 “왜 삐졌어?”라고 말해 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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