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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 Jan 29. 2022

외짝-사랑

동경은 사랑으로 태세전환을 했다. 


대학 때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다. 선배와 나는 같은 수업 같은 조였다. 꼬박 조모임에 참석하면서 멀찍 떨어져 있던 선배와의 자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난 그때 사랑에 미쳐서, 정말 선배뿐이 보이지 않았다. 선배는 흠모하는 여성들이 참 많았는데, 나 같이 속이 다 훤히 보이는 사람은 처음 본다는 듯 굴었다.


카카오톡을 쓰지 않던 선배 덕분에 나는 종종 문자로 말을 걸었다. 선배는 아주 가끔 심심하면 나를 불러냈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 부르면 다 나갔지만 투덜거림은 잊지 않았다. 그럼 또 선밴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웃을 듯 말듯 한 표정으로.


조원들끼리 늦게까지 회식을 하던 날. 해장국을 먹으며 꾸벅 졸다보니 버스가 끊겼다. 우린 누군가의 자취방에서 하루를 보내려 5-6명이 함께 자리를 떴다. 선배는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씹었다. 선배가 껌 종이를 바닥에 막 흘리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라면 정이 뚝 떨어졌겠지만, 난 그 마저도 좋았던 답 없는 사랑꾼이었으니, 마음의 양심마저 배반하진 못하고 "이걸 바닥에 버리면 어떡해요" 하고 땅에 쪼그리고 앉아 껍질을 주웠댔다. 


선배는 나를 빤히 보더니 함께 쪼그려 앉았다. "이걸 왜 주워 줍지마" 하고 자꾸만 내 손을 자기 쪽으로 끌며 웃었다. 선배는 취해있었다. 그런데도 난 선배가 그저 쓰레기를 줍지 못하게 막는 손길에 심장이 조금 많이 아팠다. 내 심장을잡고 짤짤 흔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곧 누군지 기억도 안 나는 사람의 자취방에 도착했다. 추운 날이었음에도 너무 답답했다. 이대로 자긴 힘들다는 생각에 모두가 잠든 때 나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선배도 눈을 떴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라 나섰다. 그리고 소문이 났다. 우리 둘이 은밀히 나갔다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하지만 난 좀 억울했다. 정말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났으면 좋았겠지. 그날의 단상은 이렇다. 


우린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선배는 과실에 잘 곳이 있다고, 전기장판도 있다고 무심히 말했다. 나는 선배를 따라 나섰다. 가는 내내 우린 또 티격태격 했다. 선배가 나에게 잔소리 하는 게 좋아 입꼬리가 통제불능 상태가 됐다.


과실에 도착하니 선배가 말한 전기장판은 아주 작았다. 나는 선배 옆에서 춥다고 징징거렸다. 선배는 자기 옆 이불을 들추고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거절 않고 쏙 그 옆에 꼭 붙어 누웠다. 등 뒤에 선배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난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심장 위에 혼자 포갠 손바닥은 강한 진동으로 현실임을 알리고 있었다. 심장은 평소와 다르게 쿵쿵쿵 배속을 돌린 것처럼 뛰고 있었다.


황홀한 시간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난 맥주 한 잔에 금방 헤롱거리는 사람이었고 그나마 마시는 술에는 금방 잠들곤 했던 알콜 XX였다. 그대로 까무룩 잠에 들었다. 그날 기억은 그걸로 끝이었다. 다음 날 우린 피곤한 얼굴로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내 억울함은 그 후로도 내내 이어졌다. 선배는 종종 나에게 뜬금없는 문자를 보내왔다. 치킨이 먹고 싶으니 같이 먹으러 가자던지, 영화 볼 건데 너도 오라던지, 그럼 나는 쫄랑쫄랑 쫓아나갔다. 선배의 가장 열받는 점은 매번 나에게 "오늘은 니가 사라"하면서도 자기가 다 돈을 낸다는 점이었다. "니가 무슨 돈이 있겠냐" 하면서, 나는 선배에게 많이 기생했다. 참나.


열 받는 점 2. 이런 날도 있었다. 어쩌다 길을 함께 걷는데 선배가 심하게 장난을 쳤다. 선배는 짜증내며 우는 나를 꼭 안으며 웃었다. 말이 되나? 어떻게 사귀지도 않는데 안을 수가 있지? 선배의 무심함을 여러 번 고소하고 싶었다. 


열 받는 점 3. 선배는 깊은 새벽 전화해 주절주절 나랑 떠들었다. 나는 자다가도 안 잔 척 전화를 받았다. 내가 더 이상 심장이 아파서 아무 말 안 하고 있을 때,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 나는 부르지 말란 말도 못하고 그저 듣다가 침묵. 그럼 선배는 노래를 마친 뒤 혼자 읊조렸다. "잘자"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그렇게 여러 밤을 앓았다. 


선배랑 함께한 추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내 심장 구석구석을 떠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함께 타임스퀘어로 연말 공연을 보러 갔던 날. 우린 찜질방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불현듯 마음으로 각성했다. 선배는 나를 성애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생생한 현실이 선배 옆에서 잠든 그 밤, 불쑥 내 마음에 끼얹어졌다. 그리고 조금씩 선배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사랑이 너무 아프면 외면하고 싶은 순간도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선배의 인스타그램을 발견했다. 옛 연인의 인스타 따위 한 번도 궁금해 한 적 없던 나인데. 짝사랑하던 사람의 인스타는 좀 궁금했나보다. 그리고 발견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여성과 그 옆에 활짝 웃는 선배 모습을.


심장이 아프진 않았다. 그냥 아주 조금 미세하게 찌르르 했을 뿐. 그래 나에게도 그런 사랑이 있었다. 그 정도로 아주 작고 작은 추억으로, 하지만 누군가는 작은 추억 하나로 일생을 산다던데, 그런다던데. 


동경이 사랑으로 태세전환을 했던 시절의 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오래 잔상처럼 내 안에 남으리라고 예감했던 것도 같다. 그래 나에게도 그런 사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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