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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 Jan 04. 2024

지워지지 않는 말풍선 (퇴사 diary 1)

(*드라마 <브러쉬업 라이프 (brushup life)>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 달리기에 나섰다. 내가 바람을 앞지르기도 하고 바람이 나를 가르고 지나치기도 했다. 26분 동안 천천히 걷고, 천천히 달리고, 호흡을 의식해서 뱉었다. 다리가 조금 저리는 것도 같았는데, 충분한 예열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의 찬 공기가 얼굴에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최근 드라마 <브러쉬업 라이프 (brushup life)>를 봤다. 제목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brushup'의 뜻을 찾아보니 이러했다. "(전에 배운 것, 잊혀 가는 것 등을) 다시 공부하기, 다듬기". 삶은 살아가는 와 중에도 잊혀 가는 것이니까. 드라마의 주인공 '콘도 아사미'는 언젠가부터 지나쳐가던, 잊혀가던 인생을 다섯 번이 넘게 돌아가 살아낸다.


약 170년이 넘는 삶을 살며 여전히 신기한 것들에 눈을 반짝거리기도 하고 일상의 지루함을 느끼며 점점 생기를 잃어가기도 한다. 약사가 됐다가 방송국 PD가 되기도 하고, 파일럿이 됐다가 다시 시청 직원이 되기도 한다. 대충 지나고 싶은 것들은 좀 더 쉬운 방법으로 해결해 낼 때도 있지만, 마침내 마지막 회차의 삶을 살게 될 땐, 조금은 다른 마음이 된다. 기어코 잘 살고 싶다.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가족들과 사랑하는 이들과 같이 살아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콘도 아사미의 결심은 "마지막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모든 체험이 소중해지는 거 같아. 지금까지도 대충 살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에 친구 우노 마리는 "그건 그래. 원래 마지막이었을 테지만. 그렇지" 그리고 그들은 재밌다는 듯이 웃는다. 인생은 언제나 마지막 사는 것처럼. 한 번뿐이라는 듯이 살아야 한다는 걸. 그들은 아는 듯하다.  


얼마 전 다니던 회사의 마지막 출근 날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날의 방송 클로징에 DJ는 나의 퇴사 사실을 알리며 이렇게 말했다. "제 목소리가 조금 슬프죠? 말씀드렸지만.. 알콩달콩 같이 일 했던 우리 다다 작가가 오늘까지만 방송 같이 하구요. 내일부터 어디 간대요~. 내일 당장 가는 건 아닌데, 여행도 가고 다른 일 하기 위해서 준비한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 고마웠어요 그동안. 근데 어쩐지 또 올 거 같아 (ㅎㅎ). 오늘 끝곡은 휴 그랜트와 헤일리 베넷의 <Way Back Into Love> 준비했습니다. 어.. 다다 작가 그동안 수고했다고 게시판에 좀 따듯하게 남겨주세요. 행복한 수요일 아침 보내시길 바랍니다"


얼굴을 알지 못하는 애청자들의 안부 인사가 게시판에 쏟아져 내렸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에는 존재하지 않는 답장 버튼 대신 마음으로 감사의 리플을 달았다. 나도 덕분에 많이 웃으며 일할 수 있었다고.  


"다다 울었겠군. 펑펑-" 엄마에게 마지막 근무날의 소감을 전하자 했던 말이다. 그리고 덧붙인 이야기 "고생했어 딸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엄마가 응원할게~~" 새삼 떠오르는 거다. 뭐든 새로운 것에 발을 걸치기 위한 여정 앞에는 엄마의 단단한 응원이 있었다는 걸.


하나의 인생을 온전히 나로 꾸리기 위한 여정이 전보다 기대로 차올랐다. 찔끔 울면서도 입꼬리는 실실 올라갔다. 넘어져도 웃으며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건 모두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건넨 응원 덕분이라는 진실을 아무리 지우개로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말풍선으로 삼아보겠다. 그리 다짐하며 주먹 쥔 손으로 글썽이는 눈물을 세게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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