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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띵쏘 Aug 20. 2016

아빠가 작아졌다

체어맨이 작았던 아빠가 5톤 트럭에서 웅크리고 있다

아빠를 배웅했다. 

몇달만에 서울에 올라왔다. 

종종 화물차에 거제도에서 잡힌 오징어나 갈치를 싣고 하루를 꼬박 채워 가락동 농수산시장에다 뭍사람들 싱싱하게 먹으라고, 어쩜 화주가 빨리 다녀오라고, 그렇게 서울에 올라온다. 건설용 쇠파이프를 싣고 제주도를 가야할 지 오징어를 다시 싣어야 할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오늘이다. 멸치 700박스를 싣기로 결정하고 서울에 있는 딸들에게 저녁을 먹자고 전화한다. 오후 세시, 일에 치여 정신없는데 아빠가 서울집에 오겠다는 전화는 반갑지가 않다. 항상 누구나 그러하듯 설겆이는 쌓여있고 집은 엉망이기에 집치울 걱정이 앞선다. 


저녁을 먹자는 아빠는 이번에도 12시가 넘어 도착했다. 

같이 밥먹자는 소리에 베이글 한조각으로 점심을 때워놓고 한없이 기다렸다. 이미 아빠가 도착했을 때에는 허기조차도 사라진지 오래되어 피곤한 의무감만 남았다. 너무 늦으면 배달음식조차 먹을 수 가 없어 미리 시켜 두어 차가워진 족발 앞에 둘러 앉는다. 


"오랜만에 서울왔네"

"저녁먹자면서 왜이렇게 늦게 왔어"


다 아는 질문을 늘어 놓는다. 가락동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화물차들이 많아 저녁시간만 되면 전쟁이라는 글을 아빠가 아닌 신문에서 보았다. 먼저 도착한 10분이 차가 밀리다 보면 한 두시간을 벌수도, 혹은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기에 고속도로를 정신없이 달려와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아빠는 점심도 저녁도 거르고 그렇게 올라왔는데, 중간에 소나기를 만나 멸치박스가 젖을까봐 화물칸에 포장을 치고 오느라 더뎌졌다. 


꾸역 꾸역 식은 족발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의 아빠는 화물차 운전기사지만, 그 전에 아빠는 아니었다. 

삶이 너무 복잡한 당신이라 거의 삼십여년을 자란 딸이 모르는 이야기도 많겠지만, 그래도 두세번전쯤의 직업은 화물을 알선하는 사장님이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앞에 거대한 화물알선소들이 모여있었고, 그 건물 이층에 아빠이름의 한글자를 따서 만든 사명의 물류회사가 아빠 것이었다. 커다란 체어맨에 항상 양복을 입고 출근하였고 차의 뒷좌석에는 거래처에게 뒤로 전할 양주병이 있곤 하였다. 동그라미가 일곱개나 여덞개쯤 있는 어음을 지갑에 넣고 다녔고 그 시절 자식들이 좋아하는 돼지갈비를 사주면서 오늘은 몇백만원을 벌었다며 은근한 자기 능력에 대한 자랑을 하는 사람이었다. 

 

허술하게 쌓아올린 아빠의 성공,  그 비슷한 것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버렸다. 


'행복한 가정의 이유는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의 이유는 다 제각각이다' 그 유명한 톨스토이도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 가정은 아빠때문에 불행해졌다. 


가정과 사업은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빚과 책임감과 아이들은 엄마의 몫이었다. 아빠는 그 모든걸 남겨두고 자기 몸만 나갔다. 아빠 나름대로 다시 잘해보려 한것 같았다. 엄마말대로 '그래도 일은 잘하는 사람' 이었으니까, '돈은 벌줄 아는 사람' 이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이 아빠에게 두번 다시 그런 기회를 주려하지 않았다. 벌이는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건강했던 몸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다시 물류회사 사장님이 되려던 아빠는, 잘못된 디스크 수술 후유증으로 얻은 저린 손으로 운전하는 5톤 트럭 기사가 되었다. 


한나절을 서울 딸들 집에있다가 내려가는 아빠를 배웅했다.

그 시절 기름진 피부와 건장한 풍채의 아빠는 막 세차된 체어맨을 작게 만들었었다. 

지금 빈 5톤 트럭 운전석에 웅크린 당신에게 이 차는 너무나도 커서 아빠가 작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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