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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별 Sep 25. 2023

내 마음 알기가 이렇게 어려울 때가 있었나

 그동안 나를 잘 안다고 자부했는데 이렇게나 나를 모르겠을 때가 있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나를 모르겠을 때의 이유는 너무 단순한 이유였다. 쉬지 못해서였다. 단순히 쉬지 못해 에너지가 없으니 이성적인 사고 능력이 떨어지면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도 함께 떨어진 것이다. 게임으로 치자면 프린세스 메이커에서 캐릭터가 지나치게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서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어 능률이 떨어지는 상태와 마찬가지의 상태였던 것이다. 힘든 와중에도 마지막 이성을 발휘해 지나친 분노는 분출하지 않았지만 다소 감정적이었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번에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내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아 있는 일은 매듭을 풀 수 있으면 풀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으니 가능하면 빨리 푸는 것만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말이 잘 해석되지 않을 때,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시간을 두고 곰곰이 생각하는 일이 나에게 잘 맞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곱씹을 수 있어서 책이나 글의 형태의 정보 전달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나라는 인간은 너무나 이미지(심상) 위주로 기억을 하는 사람이라서 빠른 답변을 강요하는 상황에 놓이면 적절한 어휘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누군가 보내면 충분히 시간을 들여 답변을 해보고 어떤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훨씬 편하다. 


 나도 내가 신기할 때가 있는데 때때로 어떤 색상이 매우 눈에 띄고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그 색상이 나의 감정이나 어떠한 심경 변화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나의 능력이나 표현 방식에 대해 신기하게 여기기도 한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때는 특히, 더더욱.


 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을 좋아하고 (이건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래왔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맞추는 일을 즐긴다. 상대방의 취향을 저격하기 위해 취향을 수집하고 그 사람에 대해 깊이 알아가는 일을 너무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나의 취향 저격이 맞아떨어질 때 너무도 기쁘고 즐겁고 재미있다. 내가 제시한 것들이 꼭 정답은 아닐지라도 그 사람이 찾고 있던 것, 그리고 있던 것과 비슷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말할 때, 무언가가 궁금하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왜 그리 크게 들리는 건지 그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답을 못 찾았다. 아빠에게 해주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아빠의 꿈은 무엇이었고 아빠는 어떤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아빠는 어떻게 살고 싶었을까?라는 마음속 응어리가 내 안에 가득하다.


 내가 하고 있는 많은 일이 아빠가 해보고 싶었던 일 중에 하나이긴 하다. 하지만 아빠를 대신에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아빠를 향한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어찌할 바를 몰라서 한 일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일본어 공부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 아빠가 일본어를 알려주기도 했고 나도 일본어를 좋아하니까 꾸준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빠의 능력을 항상 폄하하는 말들을 했기 때문에 (엉뚱한 데 밑줄을 긋는다는 표현을 사용함), 아빠가 그것보다는 잘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빠가 미처 따지 못한 일본어 능력시험 2급을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에 취득했을 때는 무척 기뻤던 것 같다. 


 그리고 아빠는 일본어를 그렇게 공부하고 일본에 가고 싶어 했지만 막상 일본이라는 나라에 가본 경험은 없었다. 아빠가 싱가포르 출장은 갔어도 일본은 가지 않았다. 일본은 내가 갔는데 (웃음)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모아둔 돈으로 도쿄에 갔다. 도쿄에서 자는 첫날밤에 아빠를 생각하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아빠에 대한 기억은 잊은 채로 나로 살았다. 아니 사실 잊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 엄마는 내가 아빠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면 크게 화를 내곤 했는데 이는 엄마의 방어기제 작동으로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었다. 나는 아빠 닮아서 화를 주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되려 화를 주체 못 하는 건 엄마인 경우도 있었다.


 나는 화를 주체 못 하는 것이 아니라 화를 표현하는 적절한 방식을 몰랐다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설명이다. 지금도 사실 화가 나면 눈물부터 나기 때문에 내 마음을 아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서 화를 내며 상대방의 마음을 끊임없이 찌르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다. 

 

 대학교 4학년 때부터 독서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는데 독서의 가장 큰 이점은 나를 다스리는 법을 알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채울 수 있지만 가장 좋았던 점은 나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의 나와 그리고 미래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무엇인지를. 


 아빠도 책 읽는 걸 좋아했다. 나는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광화문 교보문고로 도망쳤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어 원서, 다채로운 펜들, 노트, 종이, 책 그리고 아빠와 함께 보았던 광화문 교보문고의 천장의 모습. 광화문 교보문고의 인테리어는 어린 내 입장에서 상당히 독특했는데 그 이유는 천정이 약간의 금색으로 도금이 되어 있고 그 때문에 위를 쳐다보면 내 얼굴이 반사되어서 비친다는 점이었다. 다른 공간에서는 천정이 반사가 되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에 나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던 첫날(사실 첫날이 아닐 수도 있고 기억 속의 첫날일 것이다)의 장면이 생생하다. 그리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계속 가는 루틴을 만들었더니 어느 날부터는 아빠가 보고 싶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가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는 영감을 얻기 위해서 가는 곳이 되었다. 


 사실 아빠가 나에게 남긴 이메일 같은 것들이 어딘가에 있었는데 오래된 계정의 데이터를 삭제한다는 이유로 아빠가 보낸 메시지가 전부 삭제되어 있어서 몹시 슬픈 것이 사실이다. 또, 아빠는 기록을 많이 해서 일기와 메모를 많이 남겼는데 (현재의 내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엄마는 아빠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 자료들을 거의 다 버렸다. 나중에 엄마가 울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유품 정리는 3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기를 주변에 추천한다. 엄마에게는 괜찮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 아빠는 나에게 DNA와 경험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분명히 비슷한 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빠에게는 또 어떤 면이 있었냐면 지체 장애우가 그리는 그림을 후원하는 일을 했다. 나는 현재 여성용품 후원과 연고가 없는 어린이 후원을 하고 있는데 소액이지만 그래도 하는 이유가 뭔가 그러한 뜻을 계승하고 싶다는 의미가 있다. 아빠도 나처럼 MBTI가 NF였을 걸로 추정이 되는데, 아빠는 내향인임이 확실하기 때문에 INFP 혹은 INFJ였을 것이다. 아빠가 회사랑 잘 안 맞아서 관두고 1인 기업을 운영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가치에 대한 통제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INFP보다는 INFJ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 있다.


 아빠의 사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나는 흔히 어른들이 말하는 '대기업 입사' 루트를 가려고 했는데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사실 1인 기업 대표만은 피하려고 애썼는데, 결과적으로는 코로나19로 1인 기업 대표가 되고 우리 아빠는 실패했던 그 길에서 나는 아직까지 선방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신기하다.


 2년 전에 집을 정리하다가 신기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아빠가 쓴 석사 논문에서 어떠한 힌트를 얻었다. 아빠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에 대한 힌트 말이다. 아빠는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 아빠 친구 중에 서울에만 지나치게 모든 경제권이 집중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지방 분권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아빠가 석사 과정을 밟을 당시에 친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대방이 아빠 논문에 축하 메시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당 인물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한 대학의 교수님으로 지방 분권화 연구를 하시더라. 나는 그걸 발견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왜냐하면 내가 국제교류원으로 지원했던 이유는 한국이 지겨워서도 있지만 한국은 서울 공화국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방에서 살면 어떨까?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한국 지방엔 아무런 연고가 없기 때문에 (나는 친가와 외가 모두 본가가 서울, 경기도라 수도권이다) 지방 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야마현에 가기 전에 나는 '커뮤니티 디자인'이라는 책을 읽었고 해당 도서는 지역 사회의 커뮤니티 활동에 대한 다양한 사례가 나온다. 그래서 아마 아빠는 나와 생각하는 결이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내가 하려는 일을 아빠가 알았다면 누구보다도 기쁘게 생각하고 좋아했을 것이라는 예상이 들었다. 


 엄마는 아빠와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엄마 앞에서 아빠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데, 엄마는 엄마 마음 때문에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라든가 표현을 제대로 내가 못할까 봐 미안한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하루는 친구한테 너희 집은 제사 안 지내니?라는 질문을 들었다고 집에 와서 이야기를 하더라. 그래서 내가 한 답은 엄마와 아빠가 처음 만난 교보생명 빌딩에 (엄마와 아빠는 교보 생명에서 근무했고 사내 연애로 결혼), 내가 쓴 책이 있는데 그게 효도가 아니면 뭐가 효도야?라고 말이다.


 아빠도 내가 제사를 지내기를 바라지 않고 본인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본인의 뜻을 계승해 주기를 바랄 것이라고 그렇게 믿는다. 유치원 때 받은 카드에는 '착하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라' 이런 말들이 쓰여있는데, 엄마는 형식적인 말이라고 했지만 아빠에게는 진심이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말을 할 때 진심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빠와 닮았으니 아마도 진심일 테지.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그게 아빠 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뒤로는 아빠의 꿈을 물어보지 못했다는 미련이나 응어리가 많이 줄었다. 그랬더니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꿈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일을 하고 있더라. 나도 왜 그러는지 나도 잘 모르지만 나도 좋고 상대방도 좋으니까 굳이 나쁠 게 있나 싶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자기 이익만 취하려고 하는 사람을 극도로 혐오하고 거리를 두는데, 원래 그런 걸 내가 어떻게 하나 싶다. 생긴 대로 살아도 별 문제가 없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경제적 그리고 심리적 제약이 있으니까 신이 주신 배려가 아닐까 싶다. 우리 엄마처럼 자주적인 사람을 엄마로 두게 하시고, 자기가 알아서 A부터 Z까지 거의 다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우리 언니를 언니로 두게 해서 실은 내가 둘에 대해서 구태여 뭔가를 더 해줄 필요가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나에게 굳이 뭔가를 해줄 필요가 없을 때가 많다. 나는 내가 알아서 잘하거든 (웃음).


 그리고 얼마 전에 상담을 받으면서 또 알게 된 사실인데, 상담받기 전, 사전 문장완성 검사지라는 양식이 있다. 마지막 질문이 이거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 아빠, 언니, 나라고 적었고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임을 인지하며 오열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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