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램램 Apr 20. 2022

드라이브 마이 카_ 내 낡은 서랍 속

책상 서랍은 늘 엉망이었다.

물건이 넘쳐 뒤로 넘어가면 서랍이 제대로 닫히질 않아 꺼내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가끔 날을 잡아 정리해도 물건들은 금세 뒤엉켜버렸다.  


마음속 어딘가에도 정리되지 않고 뒤죽박죽이 된 서랍이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가 절대 열어보지 않길 바라며

나조차 뭐가 있는지 잘 모르고, 열어 보고 싶지 않은.

닫힌 상태로 두고 손대고 싶지 않은 생각이나 기억으로 꽉 찬 마음의 서랍.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 두 사람은

깊고 어두운 서랍을 품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아내의 비밀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쓰다 결국 아내를 잃어버린 유스케.

사고로 죽어버린 엄마에 대한 자책을 하며 엄마를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남은 미사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마음속 깊은 서랍에 묻어둔 채 일상을 살아간다.


출발지에서 목적지로 이동하는 시간은 필요하긴 하지만, 유의미하지 않은 시간이다.

그래서 그 시간을 채우는 것은 대화나 교감 대신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연극 대사와 침묵이다.

둘은 오랜 기간 그렇게 연출자와 극단에서 고용한 드라이버로 침묵을 시간을 공유하다가

일상적인 목적지가 아닌 낯선 목적지를 향할 때마다 서로를 조금씩 발견하게 된다.

서로가 안고 있는 서랍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유스케가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다고 말하자

미사키는 그녀가 일했던 폐기물 처리장으로 향한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폐기물들이 눈처럼 부서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곳.

끝의 끝의, 끝이 반복되는 곳.

히로시마의 역사가 지나가는 곳이고, 떠밀리듯 시작된 미사키의 여정이 멈춘 곳이다.


 

침묵만이 흐르던 두 사람의 차 안에 타인이 등장해 균열을 내고 난 뒤,

두 사람은 각자의 서랍 속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미처 열지 못하고 오랜동안 끌어안고만 있던 서랍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한다.

그 속에서도 각자의 서랍은 덜컥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은 채다.


영화의 후반부, 북해도를 향해 한참을 달려

눈 쌓인 미사키의 옛 집터에서 다다라서야 두 사람의 서랍이 열린다.  

와르르 무너질 듯, 부서지며 열릴 듯했던 어둡고 두려웠던 서랍은 생각보다 조용히 열렸다.

과거의 상처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온전히 마주해버리는 순간에 자기 자신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던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살아가기를 다짐한다.

서랍에는 두려워했던 만큼 어두운 진실도, 슬픔도 없었다.

나눠가지기 충분한 정도의 기억의 무게가 있었을 뿐이다.  

 

완벽한 타인이었던 두 사람이 어쩌다 서로의 서랍을 열게 하는 존재가 되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둘 사이에 침묵은 자연스럽게 머물렀고, 서로 닮은 흉터는 천천히 드러났다.

공통점이나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서로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같지도 않다.

열고 싶지 않은 마음과 열어버리고 털어내고 싶은 마음의 동요가 부딪히던 타이밍에

우연히 두 사람이 함께였던 걸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미사키는 유스케의 차를 타고 새로운 도시에 정착해 있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 장면이 사실 이 영화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타인의 과거를 물려받아 지금을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세이고, 죽어버린 사람들이 그 기회를 주었다.

떠나버린, 죽어버린 사람들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해 더 나아가야 할 길을 남겨 두었고

이 이어달리기는 과거의 사람들과 함께 달려가는 일이기도 하다.

어둡고, 어려운 과거를 마주한 뒤에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예기치 않았던 재난, 비극, 과오들을 피하지 않고 제대로 바라보면 

여기 머무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얘기해준다.

  


상처를 안은 두 사람이 서로를 치유해주는 이야기로도 충분했고, 거기서 멈출 수도 있던 이야기는

마지막 장면에서 시대와 세대로 연결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떠나버린 사람들의 자리를 물려받아 나아가고,

상처는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바람이라는 것.

 



지금 내 서랍은 예전보다 많이 비워졌다.

버릴 수 없던 꿈, 잊을 수 없던 추억, 무언가에 대한 미련, 누군가에 대한 감정같이  

어쩔 줄 몰라 쌓아두기만 했던 것들은

하나씩 버리기도 했고, 저절로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것들과 버렸지만 잊히지 않는 것들이 남아있는 서랍.  

거의 열어보지 않아 그렇게 믿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줄 과거가 아직 그곳에 남아있다면 좋겠다.




우리는 분명 조용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