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가난한 구단 중 하나인 오클랜드 에슬레틱스의 구단주 빌리빈은 주전선수들이 다 떠나간 자리에 데이터와 예측을 통해 저평가된 선수들을 영입한다.
처음엔 시행착오를 겪지만 뚝심 있게 밀고 나간 그의 '통계 기반의 전략'이 성공하면서 19연승이라는 기록을 달성하고 있었다.
20연승을 결정하는 경기, 11대 0으로 순조롭게 앞서가던 팀은 거짓말처럼 추격을 당하고 11 대 11의 스코어로 9회를 맞이한다.
결정의 순간 타자로 나서는 건 자신에게 날아오는 공이 가장 무섭다고 말하는 1루수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순간에 그는 시원한 홈런을 치고, 팀은 20연승의 대기록을 달성한다.
이 순간 주인공은 말한다.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주인공은 연봉으로 좋은 선수를 영입할 수 없기 때문에 각종 데이터를 통해 저평가된 선수들을 제대로 기용하는 방법을 택한다. 선수들의 타율, 출루율과 같은 숫자는 달러가 따라붙는 숫자로 승부할 수 없는 그가 택한 또 다른 숫자다. 스포츠는 그런 숫자놀음이 아니라는 비난에도 맞서야 한다.
하지만 그는 우직하게 밀고 나가고 승리하는 팀을 만든다.
하지만 그런 팀도 가끔은 위기를 겪는다. 아무리 잘해왔어도, 아무리 좋은 선수들이 팀워크를 만들어내도 가끔은 잘 풀리지 않는 경기 같은 게 있는 법이다. 스포츠니까.
역전패를 앞둔 순간에 빌리빈은 그동안 자신이 겪어 온 실패와 좌절의 순간을 회상한다.
그의 신화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연승신화도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하는 순간 흐름을 바꾸어 놓는 건
'의외의 선수'다.
부상 이후 내리막길을 걷던, 애슬레틱스의 데이터로 새로운 기회를 얻은 선수는 '의외의 홈런'으로 팀을 승리로 이끈다.
빌리빈이 들여다본 수많은 숫자도 이 선수의 홈런을 예측하지는 못했을 거다.
영화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의외의 홈런 너머에 이 선수의 성장이 보인다.
그의 타격 연습도, '자신에게 날아오는 공을 가장 두려워했던 1루수'의 마음의 훈련도.
숫자로 얘기하는 것은 명확하다.
10%의 성장, 50%의 하락, 99%의 지지, 1%의 반대
100억 불 수출 달성, 평가 1위 달성,
100점, 70점, 30점.
별점 3개, 별점 1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케팅으로 참여했던 영화는 작은 영화였다.
유명한 배우나 감독도 없고 흥행이 어려운 장르였고, 경쟁작들도 많았다.
예산도 적었고, 만듦새도 화려하지 않았다.
손익분기점도 넘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던 영화의 배급사는 블라인드 모니터링을 여러 번 했다.
블라인드 모니터링은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편집 수정이나, 마케팅 전략 수립을 위해서
일정한 관람층을 모집해서 최종 편집 전의 버전을 틀어주고, 의견을 청취하는 방식이다.
모니터링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자세한 답변을 요구하는 설문지를 받게 되고
제작사나 감독은 이 설문내용에 따라 안도하거나, 걱정하게 된다.
이 모니터링 설문지에는 몇 가지 장면에 대한 숫자를 적게 되어있었다.
나름 '빵 터진다'는 장면과 CG가 정교하지 않아서 반응이 우려되는 장면들이 나열되고
장면에 대한 만족도를 10점 척도로 적게 되어 있었다.
어떤 장면은 평이 좋았고, 어떤 장면의 평가는 혹독했다.
결과가 나오자 배급사 담당자는 장면의 점수를 평균 내어서 보여주었다.
이 장면은 만족도가 4점도 안되는데 이 장면은 만족도가 7이 넘으니 편집 순서를 이렇게 바꾸자고 말했다.
제작사 대표님도 나도 황당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장면은 싹둑 잘라서 옮겨 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장면의 내용이 여기저기로 연결되고, 많은 것을 설명한다.
웃긴 내용을 모은다고 코미디 영화가 되는 게 아니듯이.
대단한 예술 영화도 아니고, 걸작도 아니었지만 모두가 고민한 시나리오에는 장면과 장면에 대해,
인물과 인물에 대해 촘촘한 고리들이 걸려 있었다.
대표님은 감독님과 오랜 상의 끝에 편집 수정을 했지만 배급사 직원이 말한 대로 수정되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기도 하고.
배급사 담당자도 나름의 걱정과 고민이 있었을 테고, 영화라는 특징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의 장면 장면을 그렇게 쪼개어 숫자로 측정하는 방식에는 여전히 쓴웃음이 난다.
숫자는 참 쉽고 명확하지만, 그 뒤에 너무 많은 것들을 가려버리는 것 같아서.
우습지만 영화의 성공도 숫자로 많이 설명된다.
앞서 말한 영화의 최종 극장 관객수는 69만 명이었다.
다른 수익까지 포함해서 겨우겨우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네이버 영화 평점은 8.58점이다.
아주 훌륭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본 사람들에겐 좋은 기억을 남겼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영원한 나의 첫 필모그래피가 되었고 말이다.
사실 <머니볼>은 스포츠 영화라기보다 ‘신념’에 대한 영화다.
어떻게 신념을 갖게 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과 고민을 하는지 그린다.
주인공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신념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영역(9회 역전패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신념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그럴만한 것이었는지, 신념의 한계를 본다.
그리고 그 신념을 다시 이어가게 하는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타자의 홈런이다.
신념을 넘어서는 건 결국 신념 그 자체나 숫자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순간들이 주인공이 야구를 사랑하게 하고,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게 한다.
신념을 지켜가지만, 신념이 옳음을 증명하는 것에 천착하기보다,
신념을 지켜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의외의 순간들, 숫자나 믿음 뒤에 가려져 있던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길 늘 바란다.
영화 <왕의 남자>의 개봉을 앞두고 시사회에 참석했던 장항준 감독의 일화를 좋아한다.
소재도 낯설고 파격적이라 극장에 온 관객들 반응이 안 좋아서 이준익 감독은 무척 걱정했다고 한다.
시사회가 끝나고 박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그런데 영화가 개봉하자 관객들은 <왕의 남자>를 사랑했다.
천만관객을 동원했고, 그때도 지금도 사랑받는 좋은 영화로 남았다.
낯선 이야기들이 등장할 때 우려와 걱정이 따라오지만 그런 의외성이 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든다.
나는 영화의 그런 예측할 수 없는 점이 참 좋다.
숫자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의외의 순간이 정말 짜릿하다.
그런 순간을 만날 때마다 곱씹는다.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