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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미래 Aug 24. 2021

엄마가 아플 때 우리는.



  외할머니는 오랜 병환 끝에 돌아가셨다.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던 터라 엄마의 기분 같은 것을 전혀 살피지 못했지만 남아있는 사진들로나마 알게 되었다. 엄마도 할머니와 함께 아팠다는 것을. 그리고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였다는 것을.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래 지나지 않아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셨다. 

우리를 두 손 가득 안고 선 이제 갓 마흔이 된 사진 속의 엄마는 놀이동산이나 한낮의 계곡 앞에서도 홀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배경과 그 표정이 너무도 이질적이라 가위로 오려 붙인 사람 같기도 했다. 

나는 눈치가 빠른 아이는 아니었지만 엄마 말은 너무 잘 듣는, 어떻게 보면 엄마에게 분리 불안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는 아이였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나는 한참 엄마가 힘들었을 그 시기에 엄마 곁에 계속 붙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절의 엄마의 하루가 어땠는지 가끔 또렷이 기억이 난다. 아침에 쌀통에서 쌀을 꺼내는 엄마, 집 마당에 돗자리를 펴는 엄마, 옆집 평상에 앉아 소일거리로 신발 밑창을 자르는 엄마, 내가 학원 봉고차에서 내리면 마중 나오던 엄마. 몇 날 며칠이 조합된 기억이겠지만 나는 엄마를 명민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왜냐면 두려워서. 


엄마가 아프면 우리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세상에 그렇게 무서운 것이 없다. 갑자기 닥친 재해를 맞닥뜨렸을 때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우리를 살펴봐주던 반짝이던 눈동자에 어느 사이 구름 같은 것이 드리워지고 신체의 중요한 건축물들이 허물어져 가는 것을 어쩔 방도도 없이 지켜봐야 한다. 우리는 갑자기 급류를 탄 시간 속에 휩쓸려 갈 뿐이다. 병원 예약을 하고 담당의의 진찰을 받고 수술을 하고 입원을 하는 사이 더 이상 엄마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너희들 그것 보란 듯이, 급속도로 약해지고 메말라간다.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어느 새벽에 죄책감이 찾아온다. 오후에 들었던 의사의 소견 따위부터 온갖 생각이 떠오르며 고막이 두근거리고 손과 발에 피가 빠지는 것 같다. 정말 두려울 때에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서 다음 스텝은 어디로, 어디에 발을 디뎌야 최선일까. 어떻게 해야 이 고비를 넘어지지 않고 지나갈 수 있나. 그렇게 머리가 터져나갈 뿐이었다. 






2021년의 여름, 이번엔 내가 아팠다. 갑작스럽게 발견된 질환으로 나는 장장 세 시간의 전신마취 수술을 받고 한 달 동안 요양생활을 해야 했다. 아들에게는 숨기고 싶었지만 눈치가 밝아진 여덟 살 아이를 속이기란 어려웠다. 나는 알게 되었다. 아플 때, 엄마 또한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을. 내가 나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가족들과 아들에게 걱정을 끼친 것이 너무도 미안했다. 

병원복을 벗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환자 같은 내 모습에 아들은 잠시였지만 얕은 탄식을 내뱉었다. 바로 내색하지도 못하고 내 눈치를 살피느라 나온 행동이었으리라. 그러나 곧 따라온 말은 보다 선명한 마음을 드러냈다. 

"엄마, 무서워" 

갑자기 너무 야위고 아파 보이는 엄마가, 처음 보는 외과 수술 상처가 아이에게는 큰 공포로 다가왔으리라. 그 한마디가 주삿바늘처럼 따끔하게 가슴 깊숙이 들어왔다. 

아이의 말은 그러나, 처음 수술 날짜를 잡을 때부터 퇴원할 때까지 줄곧 괜찮을 거라고, 다 괜찮다고만 했던 남편의 말보다 위로가 되었다. 

'너도 무섭구나, 그래. 엄마도 너무 무서웠어.' 

아이와 나는 완전히 이어져 있는 존재다. 나의 아픔을 고스란히 함께 느끼고 걱정하는 아직은 작은 이 존재에게 안기는 것만으로도 큰 안식을 얻을 수 있다. 평소에 스스로 하지 않던 빨래 개기, 장난감 정리를 나 보란듯 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 안쓰럽다가도 거기에서 힘을 얻는다.  


아이의 할머니이자 나의 엄마는 '아프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이 너무나 절절히 와닿았고 슬펐다. 나에게 이렇게 들렸던 것이다. 

엄마는 아플 수 있지만 아이에게 마음껏 드러내서는 안 된다. 

뒤늦게 엄마의 병환을 알게 되었을 때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해가 된다. 왜 이제야 얘기하느냐고 혼날지언정 나와 함께 아프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를 닮아 잠도 못 자고 두통에 시달릴 것을 아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가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그 선을 오늘도 나는 넘어 버린다.  

엄마가 아플 때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것이다.  여덟살 아이는 여덟살 수준에서 이제 마흔의 자식은 그 수준에서 엄마 곁을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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