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꿈에 어릴 적의 한 장면이 나올 때가 있다.
해가 이미 넘어간 줄도 모르고 놀다가 집으로 뛰어가는 길. 드문 드문 가로등이 논길 사이로 서 있고 고개를 들면 쏟아질 듯 별들이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달이 너무 밝고 커서 집으로 가는 내내 나를 비춰주고 바라봐주는 것 같아 달님, 하고 말도 걸어보는 어린 날의 귀갓길이 꿈에 나와주곤 한다. 얼마나 자주 깜깜해지도록 놀았으면 단골 소재로 나올까 싶어 그때 나는 뭐하고 놀았나 떠올려봤다.
그 시절의 농촌에는 변변한 놀이터 하나 없었지만, 놀잇감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계절마다 나를 불러내던 냄새와 소리들. 나는 특히 여름을 좋아했다. 누가 심어놓은 건지 알 수 없는 갖가지 작물들이 주렁주렁 열리면 꿀벌들보다 빠르게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는 와르르 몰려다니며 싱그럽게 매달린 무화과나 대추나 오이를 따먹었고 매미보다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했던 놀이들도 기억이 난다. 마을회관에 우뚝 솟아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하던 그림자 잡기 놀이, 뜨겁게 달구어진 비닐하우스 파이프에 오래 매달리기, 땅에 줄이나 그림을 그리며 하는 갖가지 놀이들. 땀이 나 견딜 수 없이 더워지면 풍덩 뛰어들 개울이 있었고 어느 집에나 들어가 쓸 수 있는 오픈된 수돗가가 있었던, 지금 생각하면 유토피아에 가까운 나의 유년기는 여름날의 잎사귀보다 진하게 내 가슴에 맺혀 있다. 여름방학이라고 적힌 과제물을 받고 두근 거리며 잠 못 들던 그 밤은 다시 찾아오지 않지만 어제의 기억처럼 선명하다. 나는 그런 유년 시절을 보냈기에 아이들이 어떻게 여름을 보내야 하는지를 안다.
2021년 여름에도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만 썼는데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나는 자영업자이기도 하지만 아이를 둔 학부모다. 마스크를 쓴 채로 졸업사진을 찍을 때에도 입학 후 제대로 등교를 못 했을 때에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제일 힘든 건 역시 여름방학이었다. 코로나는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동네에 확진자가 생겨 그나마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던 학원도 갈 수 없었을 때, 하루 종일 아이와 집안에만 있다 보면 마음은 극도로 황폐해졌다.
바깥은 여름, 초록이 눈에 띄게 싱그러운데 아이와 나는 투명한 스노우볼에 갇힌 기분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차를 몰고 인적이 드문 숲이나 바다로 나가면 그제야 숨이 차게 뛰어놀았지만 중요한 한 가지가 없었다. 바로 친구들, 이제 얼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친구들이 아이 곁에 없는 것이다.
이런 세상이 올 줄이야. 황사 때문에 마스크를 쓸 때에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코로나는 황사는 우습다는 듯 거대한 공포를 무기로 일상을 잠식시켜 버렸다.
아이들은 비가 올 때엔 장화를 신듯이, 햇빛이 강한 날엔 모자를 써야 하듯, 하루 종일 마스크를 써야 하는 이 상황에 적응해나갔다. 아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했기에 적응이라기보다 인내에 가까웠다.
아이와 나는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을 참고 또 참았다. 그러나 가끔은 공기가 없는 수면 아래에서 숨을 참는 것처럼 버거워졌다. 시간이 허투루 흘러가는 것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서른이 넘은 나의 시간은 오늘 하루가 어제와 똑같아도 괜찮았지만 아이들은 그래서는 안되었다. 어린 나의 일기장에 온통 친구들과의 사건과 소동이 가득했던 것처럼 오늘은 어제와 다른 더 새롭고 신나는 일이 일어나야 했다.
쉬는 시간은 5분, 밥 먹으며 친구와 대화 일절 금지.
1학년 입학 후에 알게 된 아이의 학교 생활은 그래서 너무나 참담했다. 하교 시간에도 텅 비어 있는 운동장을 바라보며 이 시간을 어떻게 더 참아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어제보다 나빠지지 않는 것에 안도하며 짧은 산책에 즐거워하며 아이와 나는 오늘도 코로나에 '버티기' 중이다. 최대한 긴 호흡을 가지고 수면 위로 한 번씩 고개를 내밀며 나아가다 보면 닿을 수 있기를. 내 유년기와 같은 세상이 미지의 섬처럼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찾아와 주기를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