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밤하늘에 빛나는 별
Aug 09. 2019
나(邏)라는 담을 무너뜨리는 마법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
대파괴나 두려운 어떤 일과 나 사이에 담을 세우고 나면, 그다음엔 종종 삶 자체와 나 사이에 담이 세워지기도 한다. 담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방치하면 그 담이 세워지기도 한다. 담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방치하면 그 담이 질병처럼 스스로 커진다. 나병환자들은 단지 신체적인 감각만을 잃었을 뿐이다. 종종 그들의 고통 주변에서 도덕적, 감정적 감각을 잃어버리는 이는 나머지 사람, 우리다.
레베카 솔닛
둘째 딸을 임신했을 때부터다. 호르몬으로 인한 변화였겠지만, 견고했던 감정의 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워킹맘이 으레 그러하듯 일을 하다 쉬다를 반복했다. 고졸 비정규직으로 금융기관 10년을 일해도 나를 설명해주는 종이 한 장이 없었던 나에게 경력단절녀라는 이름표가 생겼다. 불쑥 아픈 아이에게 엄마일 수도, 직장인 일 수도 없었다. 일본 회사를 다니던 남편의 회사는 문을 닫았다. 어쩔 수 없이 퇴사를 해야 하는 모양이 갖춰졌다. 1년마다 계약 갱신이 되기 위한 금융 실적과 처절한 눈치작전이 일상이 된 직장생활을 버텨온 나였다. 남편에게 취직을 빨리 하라며 닦달하지 않았다. 남편은 아파트 사는 또래 여자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 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데려오는 일은 같이 쉬고 있어도 임신한 내 몫이었다. 집안일은 태초부터 내 것 인양해내고 있었다. 남편은 새벽 3~4시까지 티브이를 보거나 컴퓨터를 켜놓고 이력서를 쓴다고 누워있다. 모두 잠든 새벽에는 거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도 종종 있었다. 담배냄새를 핑계로 나는 목소리를 한 껏 높였다.
"에이씨.! 이게 뭐야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좀 더 소리를 질렀어도 될 뻔한 상황이었는데. 딱 거기까지만이다. 13평 집안에 퍼진 담배연기만큼 스멀스멀 올라온 감정을 선풍기 바람에 날려 보내고 더 좁은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밑으로 두 살 터울 여동생 둘이 있다. 술과 사람을 좋아하던 아버지를 둔 탓에 홀로 세 딸을 챙기며 일을 했던 엄마는 늘 우리에게 "엄마가 없으면 큰언니가 엄마야."라고 얘기하며 나에게 무소불위의 큰 언니 권력을 쥐어 주고는 일터로 가셨다. 국민학교 2학년. 88 올림픽을 준비하던 시기. 이대 앞에서 새벽까지 떡볶이 리어카 장사를 끝내고 온 엄마는 올림픽 때문에 장사를 못하게 되었다며 대모를 한다고 하셨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엄마의 부재는 아빠와 잦은 싸움의 요인이 되었고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진화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엄마의 빈자리를 감추는 데 성공한 날이면 내 뒤통수는 고요했다. 곤로 위에 김치나 달걀을 부쳐 먹고는 거뭏해진 냄비와 그릇들을 빨간 고무 대야에 담가 놓고 잠이 들었다. 그다음 날 아침 등굣길에 엄마는 내 뒤통수에 말을 걸었다.
"남편복 없는 년, 자식복도 없다던데,...."
늦은 밤까지 장사를 하고 남은 떡볶이와 어묵은 내 도시락에 놓여 있었다. 정갈한 도시락통에 소시지 반찬을 가져온 짝이 볼까 싶어 후다닥 도시락을 비워냈다. 한 번은 닭발이 들어 있었다. 맨 밥을 물처럼 마셨다.
큰 언니 권력은 부모님이 안 계실 때 많이 휘둘러졌다. 청소를 시키고, 귀찮은 설거지도 가끔 시키고.
권력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엄마는 주말이면 목욕탕에 2명분의 값만을 손에 쥐어주고 보냈다. 막내를 들키지 않게 주의하라는 당부도 함께. 8살, 6살 동생의 때를 불리고 벗기는 일은 책임이었지만, 불평을 하면 깨지는 집안의 평화 같은 것이기도 했다. 한 번은 목욕탕 주인이 너희 집 어디냐며 집으로 돈을 받으러 가자며 날 앞장 세웠고 그날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매일 술이 취한 아버지는 새벽이면 자는 아이들을 깨웠다. 자는 척하며 순간을 넘기곤 했다. 한 아이라도 눈치 없게 일어날 경우엔 모두 일어나야 했다.
"너희들 불만 있는 거 다 털어놔~."
"너희들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했던 얘길 무한 반복하는 아버지의 술주정에 익숙해지기 전엔 침대가 갖고 싶다고 얘기하곤 했다. 다음날 사 주겠다며 약속을 하셨고, 아침 일찍 일어나 기다렸다. 오후 느즈막에 눈을 뜬 아버지는 그런 말을 했냐며 다음에 사주겠다고 하셨으나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이후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들을
꾹 누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어차피 말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모든 것에는 연습과 경험이 필요한 법이다. 묵혀온 감정과 서사를 입 밖으로 뱉는 일은 담을 세우는 일 보다 더 어려워졌다. 살펴보지 않고 두꺼워진 담이 숨통을 조여올 즈음 살기 위한 몸부림을 시작했다. 상담도 받고 쏟아지는 감정을 표현하려고 닥치는 대로 활자를 읽었다. 비공개로 은밀히 저장한 블로그의 배설물은 보물이라도 되는 듯 힘들 때마다 꺼내 보곤 한다. 관성에 익숙한 주변에 천천히 충격을 주곤 있으나 생전에 모두 뱉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술과 사람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IMF가 한참인 시절 가출하셨다. 이후 주민센터에서 온 부양의무 거절 사유서를 통해 근황을 알리셨다. 기초수급 생활자가 되시곤 이후 1년이 지나지 않아 대장암과 췌장암으로 홀로 생을 마감하셨다. 엄마는 뇌경색, 스트레스로 인한 후유증으로 수면제 없이는 하루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잔뜩 화가 난 사람처럼 주변을 의심하는 삶을 이어나가시고 계시다. 나는 남편과의 다툼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말이 떨릴 때도 있고, 더듬을 때도 있으며 눈물부터 먼저 쏟아 낼 때도 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