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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l 11. 2024

법은 법조인만 알면 되나? (2)

국격이 말이 아니다

민법은 실로 방대한 법률이다. 민법의 제1편이 총칙이고 제1편 중에서 제5장이 법률행위다.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제5장 법률행위의 제3절이 대리다. 제3잘 제118조는 대리권의 범위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대리인에게 대리권을 줄 때 권한을 정한 경우에는 그 권한만큼 대리인은 대리권을 행사할 수 있다. 권한을 정하지 않은 경우에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나. 그것을 제118조가 규정하고 있다.


제118조(대리권의 범위) 권한을 정하지 아니한 대리인은 다음 각호의 행위만을 할 수 있다.

1. 보존행위

2. 대리의 목적인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그 이용 또는 개량하는 행위


첫째, 보존행위를 할 수 있다. 물건이나 권리를 보존하는 것은 대리인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식에 부합한다. 둘째, 물건이나 권리를 이용하는 행위 또는 개량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 이용하고 개량하는 정도까지도 할 수 있고 그것을 넘어서는 행위는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 이용 또는 개량을 하더라도 '그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이 달라지게 하지 않는 범위에서'라는 조건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가 말이 되나? 읽고 또 읽고 아무리 읽어도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한 이유가 있다. '성질을 변하지' 때문이다. '변하다'는 자동사다. 자동사는 목적어를 취하지 않는 동사다. 그런데 '성질을'이라는 목적어가 나왔다. 그래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는 말이 안 된다. 한국말이 아니다.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는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라고 하거나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이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라고 할 때 비로소 말이 된다. 민법은 1958년 2월 제정, 공포되었다. 66년째 이런 엉터리 문장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다. 실로 경이적인 일이다. 긍정적인 의미의 '경이적'이 아니다. 놀랄 만큼 수치스럽다는 뜻에서 그렇다. 


법조인들은 이 조문의 취지가 무엇인지 알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만 어쩌다 민법 조문을 읽게 되는 일반 국민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게 뭔 말이지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아마 초등학생도 '성질을 변하지'가 말이 안 된다는 걸 알 것이다. 그런데 엄숙하기 그지없는 법조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표현이 꿋꿋이 남아 있다. 국격이 말이 아니다. 국민을 우습게 알지 않고는 이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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