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빵은 위험하다
1박 2일로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속초 여행을 다녀왔다. 12인승 스타리아에 열 명이 탑승해 판교를 출발했고 고성통일전망대에는 갔으나 비가 와서 입장을 포기하고 되돌아 나왔다. 속초 시내 리조트에 짐을 푼 뒤 저녁을 먹으러 속초 시내에 나와 생선구이로 식사를 하고 관광수산시장을 둘러본 뒤 숙소로 돌아와 1박 했다. 이튿날은 케이블카를 타러 설악산소공원으로 갔다. C 주차장에서 무려 2.8km를 걸어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가니 2시간 반 뒤 표를 끊을 수 있었다. 남는 시간에 신흥사도 둘러보고 식당가에서 밥도 먹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오르니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운무로 뒤덮여 시야는 꽉 막혀 있었다. 돌아올 때도 2.8km를 걸어 차 있는 곳으로 와야 했다. 날씨가 받쳐 주지 않은 여행이었다. 하지만 먹는 즐거움은 있었다. 두루 잘 먹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일행은 12인승 승합차를 빌렸다. 주운전자는 친구 L이었고 나는 보조운전자로 등록했다. 조수석에 줄곧 앉아 있었지만 내게 운전할 차례는 오지 않았다. 대신 친구 L의 운전하는 모습을 잘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50년 지기다. 고1 때 만나고 50년이 흘렀다. 이번에 그의 운전 습관을 제대로 보았다. 그는 운전 경력이 30년은 족히 넘었을 텐데 내비게이션이 본격적으로 쓰인 건 15년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가 처음 운전을 시작할 땐 내비라는 게 아예 없었다. 모두가 지도와 도로표지판을 보고 운전을 해야 했다. 그러나 내비가 나오고부터 사람들은 내비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말도 못하게 편리하니까. L도 그랬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내비에 목적지부터 입력했다. 그리고 내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굳은 운전습관 같았다.
이에 반해 나는 내비 비의존파다. 요즘 운전할 일도 별로 없지만 운전을 할 때도 내비를 좀체 쓰지 않는다. 미리 길 나설 때 지리를 파악한 다음 경로를 머릿속에 그려두고 운전한다. 금요일 오전 판교에서 고성으로 갈 때 운전자인 L이 동홍천에서 갑자기 국도로 빠져나오지 않는가! 순간 '이건 뭐지?' 싶었다. 차 자체의 내비와 L의 스마트폰 내비가 모두 44번 국도로 길을 안내했기에 L은 국도로 빠져나왔을 것이다. 난 생각이 달랐다. 서울-양양고속도로로 간 뒤 속초에서 고성으로 가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국도로 가는 게 거리가 짧았다. 내비가 옳았다. 내가 틀렸다. 내비 1승.
고성통일전망대에서 속초 시내 숙소로 돌아올 때였다. 내비가 진부령 쪽으로 안내하지 뭔가. 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부령 쪽으로 가면 훨씬 멀다. 그런데도 진부령 쪽으로 길을 안내한 건 거리는 멀어도 진부령 넘은 뒤 미시령터널을 통과해서 가면 우리 숙소까지 빨리 갈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 때문에 진부령 가는 길을 안내한 것 같았다. 그거까진 이해하겠다. 문제는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아래 파란색 길)
한참을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운전자 L은 그런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하고 내비 시키는 대로 달리고 있었다. 내비를 맹신하는 그에게 감히 내비가 길을 잘못 알려줬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잠자코 가만 있었다. 쓸데없이 이상한 길을 가게끔 내비가 지시했는데 L은 그저 내비가 가라는 대로만 갔다.
저녁 먹으러 속소 시내로 나와 식사 후 숙소로 돌아갈 때도 또 내비가 이상한 안내를 했다. 교차로에서 L이 잘못 길을 들어서기도 했지만 그 후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한 뒤에 내비가 알려준 길은 엉뚱한 길이었다. 훨씬 가까운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는 길로 안내했다.
얼마 전 AI의 중독성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AI 덕에 사람이 더 똑똑해지는 게 아니라 AI 때문에 사람이 생각을 대신 AI에 맡기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사람이 점점 사고 능력이 떨어진다고 전문가들이 우려한다는 걸 알게 됐다. 뇌는 쓰지 않으면 퇴화하기 마련이다. 뇌뿐이겠는가. 뭐든 마찬가지다. 쓰지 않으면 둔해진다. 늘 갈고 닦아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내비 때문에 엄청 운전하기 편해진 거 분명한 사실이다. 말도 못하게 편리해졌다. 지리를 전혀 몰라도 어디든 갈 수 있다. 내비 덕분이다. 그러나 내비에 올인하는 게 마냥 좋은가.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 내비가 시키는 대로 운전하다가 바다로 풍덩 빠져서 익사한 사람에 관한 기사도 읽은 적이 있다. 몰빵은 위험하다. 내비를 활용하긴 하되 다른 정보도 참고해야 한다. 내비보다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 내비는 내 종이어야지 내가 내비의 종이 돼선 곤란하다. 내비 7, 내 지식 3 정도 비율이 좋지 않은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