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ng May 30. 2018

30. 하루

직장과는 뭔가 좀 다르게 분주한 24시간을 보내며.

여섯 시 반, 나는 아직 한참 딥슬립 중이었던 그 시각. 미드미가 눈을 떴다. 범퍼침대의 가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한 번에 휙 넘어 내가 누워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타타탁. 강아지 발소리처럼 미드미의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누군가 내 얼굴을 탁탁 쳤다.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배시시 웃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얼마나 잘 잤는지 퉁퉁 부은 얼굴과 사정없이 뻗친 머리카락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난다. 내 웃음을 보더니 배시시 따라 웃던 미드미는 17년생 다운 100%의 완충 상태로 벌떡 일어나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고 익룡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끼잉 끼잉(열어줘!!)


8 TO 9. 우리가 미드미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8시에 자면 9시에 일어나는 미드미였는데.. 돌이 지나면서 그녀는 많이 변했다. 더 이상 배가 고프고 졸릴 때만 울어대는 '아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같아 보였고, 더욱더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데 있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12시간, 13시간씩 내리 자던 미드미는 궁금한 것도, 할 일도 많아 일찍 기상해 하루를 시작했다.


아직 완충되지 않은 30대의 나는(아마도 어지간해서는 완충이 되지 않을 나는) 방문을 슬며시 열어주고 뒹굴뒹굴 누워 '아, 나도 일어나야지'라는 주문을 백번쯤 되새긴다. 미드미가 H의 방문을 두드려 알람마냥 H를 깨우고, 비몽사몽인 H의 방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헤집기 시작한 후, 몰래 화장실에 들어가 화장실 슬리퍼 혹은 변기와 같은 절대로 만질 수 없게 하는 물건들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만지작 거리기 시작할 때쯤 H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나 역시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킨다.


미드미의 밥을 준비하는 내내 미드미는 밥, 밥이라는 단어를 외친다.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도 기가 막히게 아는 몇몇의 단어들 중 하나다. 미드미는 먹는 내내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머리카락부터 바닥까지 밥알이 알알이 새겨질 때쯤,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기의자에서 내려와 본인의 할 일들을 시작한다.


먼저, 책장의 책을 하나씩 꺼내어 책장을 비운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오늘의 업무 중 가장 우선순위에 둔 일이었던 것 같다. 책을 다 꺼낸 후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 장난감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한다. 조각을 맞추는 장난감부터 수 막대, 모양 기차, 블록..... 이때쯤 설거지를 마치고 뒤돌아 거실을 바라보면 혼란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여덟 시가 조금 넘었는데. 업무도 보통 9시부터 시작이란 말이다!!


대충 아침을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시려 포트에 물을 보글보글 끓이는 소리가 나면, 어김없이 미드미가 달리는 것만큼 빠른 속도로 기어 온다. 내 커피잔에 손을 대고 아뜨, 아뜨, 하는 놀이를 열다섯 번쯤 하고 나면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다시 거실로 간다. 책을 거꾸로 들고 한참을 보더니 이젠 세모 모양의 틀에 네모 모양의 블록이 들어가지 않는다며 온갖 짜증을 부린다. 책을 읽어달라, 단어카드놀이를 해달라, 블록을 쌓아달라 등등의 온갖 요구사항 및 응가라는 아침의 큰 거사를 치르고 나면 점심을 먹일 시간이 된다. (아직 내 커피는 차갑게 식은 채 반이나 남았는데 점심이라니..)


육류를 하루에 40g씩은 꼭 먹여야 한다는 소아과 선생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점심엔 고기를 굽는다. 배가 고픈지 이미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진 미드미에게 황급히 고기 한 점을 잘라 입에 넣어준다. 서둘러 점심을 먹이고 대충 손과 입을 닦아준 뒤 라면 하나를 끓였다. 보글보글 끓는 라면 냄비 옆 미드미의 프라이팬에 남은 몇 점의 고기를 집어먹으며 중얼거린다. 나도 고기가 먹고 싶구나. 딸아.


정신없이 놀던 미드미가 갑자기 매사에 짜증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책을 읽다가 맥락 없이 오열하거나, 블록을 쌓다가 소리를 지르면 낮잠잘 시간이 되었다는 증거다. 애착 물건이 된 수면조끼를 손에 쥐어주고 침대로 데려가 재우고 나니 세시가 좀 넘는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장난감을 정리하고 거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잠시 숨을 고른다. '애기 잘 때 좀 자!'라는 엄마의 말이 귀에 들리는 것 마냥 엄청 피곤한데도, 두 시간 후 벌어질 같은 상황을 위해 정신적 에너지를 충전한다는 명목 하에 휴대폰을 들고 웹툰을 본다. 하.. 정말이지 힐링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하루 24시간 중, 미드미가 자는 시간 9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직장에 다닐 때도 야근이 하도 많아 H는 퇴근 후 운동을 하고 개운한 몸으로 내 회사 앞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들어가곤 했다. 그때마다 H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야근은 내 숙명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어쩌면 진짜 숙명인가 싶기도 하다.


직장만큼 분주한 24시간을 보냈지만 예쁜 블라우스 대신 목이 늘어난 티셔츠, 화장 대신 질끈 묶은 머리가 왠지 모르게 나를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괜한 자격지심에 늘어난 배와 허리를 만져보며 H에게 변명 아닌 변명으로 위로를 얻고 싶어 하기도 한다. 작아진 모습에 적어진 통장잔고만큼, 자존감도 점점 하락하는 것 같아 우울함에 뒤척이는 날도 있다.


그래도 말이지, 파이팅이다. 힘이 나지 않더라도, 위로가 되지 않더라도. 내일도 미드미와 함께 같은 패턴으로 하루를 살아내야 하니까. 사람을 키우는 일에는 입사는 있어도 퇴사는 없으니!


[평소보다 조용하다 싶던 어느날의 광경. '성냥팔이소녀'의 전 출연진이 사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ㅎㅎ 팝업북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야무지게 단 하나도 남김없이 다 떼버린 미드미 덕분에 어떻게 붙여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26. 정체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