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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g Nov 23. 2018

38. 넷도 있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마법의 주문

H와 나에게는 근 십 년 이상 알아온 친구가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H의 친구이자 나에게는 선배였던 그 두 사람은 친구에서 연인으로, 그리고 부부로 발전하는 바람에(?) 영원히 함께할 수밖에 없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덕분에 H와 나는 K선배의 집에 자주 놀러 가곤 했다.


K선배는 누구나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성격 좋고 성실하고 일 잘하는. 게다가 건강하기까지 했던지 허니문 베이비에 이어 연년생 아이까지 연달아 둘을 키우고 있었다. 아이가 없던 시절, 그 집에 놀러 가면 항상 난장판인 거실과 내복 바람으로 반겨주는 두 장난꾸러기 아들들, 그리고 깔깔 웃는 웃음소리(와 간간히 혼이 나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행복이 가득한 그 모습이 마냥 부러웠다. 아들 둘의 에너지는 상상 이상이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42.195km의 마라톤을 하고 잠시, 아주아주 잠시 눈을 붙이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하지만 L언니는 그조차도 씩씩하게 잘 감당했고, 힘들다는 내색조차 한 적 없을 만큼 멋진 워킹맘이었다.


어느 느지막한 오후, H와 빵 몇 개를 사들고 여느 때처럼 K선배의 집을 방문했다. 평소 같았으면 시끌벅적할 시간이었는데 웬일인지 아들 둘이 조용했다. 거실에 앉아 블록을 조립하던 차분한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내가 물었다. “언니,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애들 왜 이렇게 차분해 ㅋㅋ 철들었나?” 그러자 언니가 꽤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말도 마, 우리 집에 애들이 또 생겨”


H와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한 삼초 간 정적이 흘렀을까, H가 말했다. “야, 축하한다. 셋째라니 대단한데?” 그러자 K선배가 말을 이었다. “근데, 넷째야”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쌍둥이라니. 연년생 아들 둘에 이은 쌍둥이 자녀. H와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거실에서 블록을 가지고 놀던 둘째가 날 보고 배시시 웃었다. 마치 자기 아래로 누군가 생겨서 좋다는 듯이. L언니의 약간은 심란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K선배의 얼굴 한구석엔 숨길수 없는 기쁨이 있었다. “난 그저 쌍둥이 중 한 명이라도 딸이었으면 좋겠어. 둘 다 딸이면 더 좋고”




K선배는 여전히 성격 좋고, 성실하고, 일 잘하는 사람인 데다 이젠 애도 잘 보는 아빠가 되었다. L언니는 육아에 있어선 "삐뽀삐뽀 육아"급의 지식인인 동시에 자기 일도 놓치지 않는 멋진 엄마로 살고 있다. (K선배의 바람대로 아들 둘에 이어 예쁜 딸 둘이 태어났으니 오죽 좋을까.)


요즈음 그 집에 놀러 갈 때면 항상 먹을 것을 두둑이 사들고 가긴 하지만 신기하게도 한 시간이면 싹 없어지는 마술이 펼쳐진다. 정신없던 거실은 두배로 어지럽고, 인테리어는 진작에 ‘개나 줘버린’ 키즈카페 못지않은 집이 되었으며, 1층이 아니고서는 절대 살 수 없다는 1층 예찬론자가 되어버렸지만 그 어느 집 보다 따뜻하고 시끌벅적하고, 조용할 날 없는 행복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밥을 먹고 나면 우리보다 치우는 속도가 빠르고, 한 명은 청소 다른 한 명은 설거지를 시작하는 최고의 협응력을 보여주는 그들은 마치 송은이와 김숙만큼의 케미를 자랑한다. 언젠가부터 미드미 덕분에 너무나 힘들 때면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넷도 있다.” 이 네 글자 속에는 더 이상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깊고도 찐한 메시지가 담겨있어서 그 어떤 일도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초자연적인(?) 힘을 선사하곤 한다.

정신없는 하루, 오늘도 산더미 같은 일을 앞에 두고 크게 두 번 주문을 외치고 시작한다. “넷도 있다. 넷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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