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답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차피 죽는데, 왜 살아요?"라는 질문에 "행복하려고 산다"는 대답을 한다. 하지만 이는 틀린 답이다.
"왜 사냐"는 질문은 Why에 대한 것이다. 반면 "행복하려고 산다"는 대답은 How에 대한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목적에 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를 의도한 것이다. 이는 "어떻게 살고 싶냐"라는 질문에 더 어울리는 대답이다.
그렇다면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은 죽는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어차피 없어진다. 어차피 없어질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필멸할 인생에 포섭되는 '행복'이라는 개념은 인생에 의미를 만들 수 없고 목적도 될 수 없다. 이는 마치 0에다 수천, 수만을 곱해본들 다시 0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 삶이 의미를 가지려면 죽어서도 영원히 이어지는 무언가를 남기는 수 밖에 없다. 예수는 2,000년 전에 죽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아직도 수십억명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400년 전에 죽었으나 그의 용기는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알프레드 노벨은 130년 전에 죽었지만 노벨상을 남겨 탁월함과 명예의 상징이 됐다. 토마스 에디슨은 100년 전에 죽었지만 그가 이룩한 전기 문명은 인류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삶이 의미를 가지려면 육신의 필멸성을 뛰어넘는 불멸의 업적을 남겨야 한다. 그게 학문적 성취일 수도 있고, 기업의 창업일 수도, 용감한 희생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사냐?"는 질문으로 돌아와 나는 "필멸할 삶이 끝나기 전, 불멸할 업적을 남기기 위해 산다."고 답하고 싶다. 사람마다 삶의 의미는 각자 다를 것이다. 중요한 건 호르몬이 시키는 맹목적 행복 추구를 넘어서 보는 것이다. 육신에서 이탈한 눈으로 인생을 관조할 때에야 내 삶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행복은 단지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내가 자주 느끼는 감정 상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