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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치 Jul 15. 2019

설날 단상

히피하피소셜클럽 첫번째 글쓰기 

1

2019년 설은 설답게 맞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연휴 시작 직전, 조용한 카페에서 일상을 정리했다. 어떤 글을 쓸지 궁금했던 친구들에게 글쓰기 모임을 문득 제안했다. 꽤 오랜 기간동안 무기력과 싸워왔다. 좋아하는 카페로 책들과 다이어리를 잔뜩 들고 걸음을 옮겼던 것도, 성급하기도 신나기도 했던 글쓰기 모임 제안도 그들에게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엄청난 한 걸음이었다. 매번 언젠간 글을 쓸거야, 독립 출판으로라도 책을 내야지, 남들 모르게 매년 신춘 문예에 글 하나씩 내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깜짝 등단을 할거야, 그럼 모두가 놀라겠지 하는 등의 어디서 기인한지 모르는 나의 게으른 인정 욕구에 지쳤던, 나의 한 걸음. 누구에게 그렇게까지 인정을 받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인상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나의 오랜 바람에의 최초의 응답같았다. 일을 그만둔 이후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단조로운 일상이 무척이나 지겨웠다. 느슨하지만 무언갈 조금씩이라도 만드는 기분이 지독하게도 그리웠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원체 잔병치레가 많은 편이라 미열이 있길래 또 감기가 왔나보다 했다. 그게 사나흘이 지나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얘기가 달라졌다. 미열에 불과했던 게 어느새 열이 펄펄 끓어 정신 없이 앓기 시작했다. 설 연휴 기간 어렵게 찾은 병원에서 39도임을 확인(?) 받고 나는 울었다. 왜 울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프다, 확인 받는 순간 왠지 조금 아이같이 누구에게라도 응석부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보다. 나 이만큼이나 아파,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억울했다. 글쓰기 모임도 기대되고 오랜만에 힘이 났던 터라 마침 연휴 기간을 맞이해서 애인이랑 조금 흥미로운 하루들을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 있는 신세라니. 


동네의 작은 병원이라 독감 검사만 했고, 다행히 독감은 아니니 감기 몸살이나 장염일지도 모르겠다는 애매한 진단으로 해열제를 처방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도 열이 내리지 않으면 오세요, 라는 말을 들었지만 해열제를 받아들고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와식생활에서 벗어나겠거니 기대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온 몸에 번진 열꽃들을 발견하고, 사람이 얼마나 열이 나면 생전 안나던 열꽃이 피고 이러나 하고 애인과 힘없이 설핏 웃었던 것도 같다. 기대와 달리 그 다음 날도 열은 좀체 내리지 않았다. 또 병원을 찾았고 이번엔 큰 병원에 가는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일일이 나열하기도 지난한 과정들을 밟아 나의 이 모든 아픔들의 근원은 결국 내가 그토록 의지했던 우울증 약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살며 최초로 입원을 하게 된 이유가, 내 살고자 하는 욕심에 닿아있었다니. 죽고 싶은 생각을 쫓고 싶어서 살려고,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열심히 먹었던 약이 나의 몸을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게 때렸다니 깊은 배신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열에 달뜬 동안, 나는 계속 나의 글쓰기 모임을 생각했다. 몸이 아프니 오히려 바라는 것들이 단순해졌다. 그냥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조용히 앉아 창밖을 보며 글이 안써진다고 평범하게 괴로워하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첫 주제는 설날이었는데, 나의 첫 글은 병상일기가 될 수 밖에 없는건가. 그런 게으른 선택은 왠지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다가 나의 지난 설들을 되짚어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별로 좋았던 기억이 없는 게 나에겐 당연했다. 데면데면한 친척들의 얼굴, 억지로 묻는 안부들, 피상적인 나의 상태-돈벌이, 직업 상태,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 유무 등-으로 은근한 질시가 오가는 대화들, 상대에 대해 크게 관심도 없으면서 으레 가벼이 행해지는 오지랖과 얕은 관심들에서 발로하는 피로함, 그런 것들.


2

그 중에서도 언젠가 설 연휴에 엄마가 나를 지독하게 부끄럽게 만들었 게 자꾸만 생각났다. 나에게 아주 괴로운 기억인데도 소재로 적합하다는 생각에 계속 떠올리려고 애썼다. 많이 잊으려고 한 탓인지 회상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외할머니 생신 겸 설이었던 것 같다. 외갓집 식구들이랑 좋은 식당에서 방을 잡아 식사를 한 경험이 많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조금 생경하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대로 된 식사 자리에서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사람들과 마주 앉아 있으려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히 먹고만 있었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부터 엄마가 기분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 되려 실없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던가. 횟집의 코스 요리가 중반으로 치달을 무렵, 큰 삼촌과 엄마가 조금씩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왜 꼭 여기 와서 식사를 해야 했는지, 다른 좋은 곳은 없었는지 하면서. 설왕설래가 오갔고 정확히 기억나는 건 딱 한마디다. “엄마는 회를 안좋아한다고!!” 하고 엄마가 크게 찢어지는 고음으로 외쳤다. 다른 식구들,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 모두 어쩔 줄 몰랐고 아빠가 나서서 말렸지만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어졌다. 귀가 어두우신 외할머니는 상황을 잘 모르셨던 것 같다. 외할머니가 자꾸 다른 소리를 하셨다. 여긴 꼭 지옥같다, 지독하게도 재미 없는 실패한 블랙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에겐 엄마를, 정확하게 말하자면 엄마의 말과 행동을 부끄러워했던 경험이 많다. 그게 나를 때로 많이 슬프게 한다. 그때의 기억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의 마음도 조금 이해가 가서, 서글프기도 하다. 외할머니와 근거리에 살지 못해서, 당신이 원하지 않았던 지방 살이를 해서, 그럭저럭 먹고 살만은 했지만 당신이 생각하기에 친정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해서. 그리고 그게 작게는, 외할머니의 생신에 좋아하시는 곳을 예약하고 모셔드리지 못해서 그게 많이 서글펐을테다. 하지만 꼭 그 자리에서 그렇게 소리를 질렀어야했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당신의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신 축하 자리를 가장 폭력적인 상황으로 만들어 버린 엄마라는 사람의 한계에 대해서도.


가족에게 으레 갖게 되는 그 애잔하고 답답한 감정들이 나를 데려다 놓는 곳이 두려울 때가 많다. 혈연으로는 가장 가깝지만 마음으로는 가장 먼 사람들과 함께 모여 있는 공간인 명절은 시한 폭탄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더군다나 부모-나와의 해갈되지 않는 마음들이 그 공간에 강제로 놓여져야 할 때는 더욱. 그래서 외할머니를 앞에 두고 찢어지게 소리를 지르던 엄마의 모습이 마음에 많이 남았던 것 같다. 가장 가깝지만 결국 가장 먼 엄마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게 해서.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정말 철저히 타인이라는 걸 아프게 느꼈던 순간이라서.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누군가의 한 단면을 원치 않게 날 것으로 봐야만 했던 기억들이 많다. 이제는 어떻게든 내 안에서 정리해야 보고 싶은 마음을 가진지 오래다. 오래도록 지독한 타인들과 불편한 명절들을 보내왔던 나에게 줄 수 있는 나의 최소한의 선물. 이제는 소화하기 어려운 감정들과, 교차하는 마음들에 해답을 얻고 싶은 나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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