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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치 Jul 15. 2019

[untitled] 서울강서여성의전화 소식지 기고글

여백 81호지에서 찾아보실 수 있어요. 


[untitled] 


직업적 성취는 나에게 있어 인생의 화두였다. 내가 속한 업계에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까지 남들이 못했던, 혹은 하기 어려웠던 선택들을 내릴 수 있는 자리에 서고 싶었다는 말이 조금 더 적확한 표현일 것 같다. 이런 결심은 내가 속한 업계가 그 어떤 업계보다 사회적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곳이라는 오랜 생각에서 기인한다. 


 나는 근 5년 간 드라마 제작사, 웹툰 회사, 영화제, 광고 대행사 등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커리어를 이어왔다. 다소 맥락 없어보이지만 대중을 상대로 하는 문화 분야의 일을 계속해왔다. 그래서 나의 성공에 대한 욕심은, 대중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에 대한 욕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회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시시때때로 마주치는 여성혐오 정서에 나는 개복치처럼 자꾸 뒤집혀 숨이 막혀왔다. 예컨대 회사에서 기획하거나 참여를 검토하는 콘텐츠에서 대부분 여성 캐릭터는 성적인 이미지로만 활용되거나, 서사의 목적에는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는 도구적인 형태로 소모되곤 했다. 여성 캐릭터는 물리적으로 폭행을 당하거나, 성폭행을 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인물이거나 명품을 좋아하는 ‘된장녀’였다. 여성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건 꿈도 못꿨다. 한마디로 여성 캐릭터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서 허락하는 여성의 ‘역할’만을 수행하는 느낌이었다. 


특히나 여성 혐오 정서가 중심을 이루는 시나리오를 기획할 때는 회의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런 텍스트를 읽는 것조차 고역인데 프로듀싱하는 작품이 그럴 때에 드는 자괴감은 말도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선은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너무 초라한 수준이었다. 다른 맥락에서의 명분을 여러 개 만들어서 같이 제작하는 사람들을 있는 힘껏 설득한 후 프로젝트 자체를 엎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밟는다거나, 최소한 수준에서라도 여성 혐오 정서를 제거해가는 방식 등 이었다. 대중 문화 컨텐츠의 사회적 책임감을 지키고 싶었던 내가 겨우 이런 방식으로 업계에  기여하는 건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런 가운데 만난 Netflix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Seeing Allred' (한제: 글로리아 올레드 : 약자 편에 선다)는 최고의 임파워링 영화였다. 페미니스트 직업인으로서의 나와 컨텐츠 크리에이터로서의 나, 두 가지 맥락에서 와닿는 바가 크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77년부터 시작해서 트럼프 시대까지 멈출줄 모르는 전쟁을 하고 있는 올레드의 모습을 보여준다. 글로리아 올레드는 최초의 여성 인권 변호사로 가장 논쟁적인 사건들을 맡아서 여성 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워왔다. 흔히 그렇듯이 그는 따발총처럼 말하는 '피곤한 여성’의 전형인 것처럼 호도당해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단 한번도 양보하지 않고 지금까지 멋지게 커리어를 만들어왔다. 

 현재 #METOO운동의 전신 격인 빌 코스비 사건1), 가정 폭력의 대표격인 OJ 심슨 사건2), 동성 결혼 합법화 등 전방위 적으로 여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쉼없이 싸워왔다. 직업적 가치관과 신념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글로리아 올레드의 단단한 자존감이 프레임 밖에 넘쳐 흘렀다. 영상으로 고작 1시간 반 가량 엿본 것에 불과하지만 신념과 합치된 그의 커리어는 그 자체로 역동성이 있었다. 그것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멋지고 부러웠다. 그 역동성이 나에게 있어 가장 절실하고, 그래서 가장 갈구하는 부분이라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혹은 우리 모두가 올레드처럼 살 수는 없다. 각자 최소한의 저지선을 지키는 것만도 결코 녹록치 않고 이것 또한 유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뭐랄까,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정체화한 사람 모두가 올레드처럼 여성 인권 변호사여야한다거나, 활동가일 수는 없지 않나. 나는 이 업계에서 당분간은 일을 잘 해내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나만의 저지선을 지켜야 한다. 


언젠가는 심지가 단단한 여성 리더가 되어 글로리아 올레드와 같은 멋진 여성 캐릭터의 이야기를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 아니, 각자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여성들을 하나씩 대중적 매체를 통해서 입체적으로 그리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현존하는 수많은 남성 중심 서사로 편향된 컨텐츠의 범람을 옛 기억으로 만들고 싶다. 


이러한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첫번째는 지치지 않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의 물결에서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지구력은 그저 만들어지지 않는다. 올레드 혹은 올레드 같은 사람들의 인생을 톺아보고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내가 혹은 우리가 종국에 이뤄낼 것들을 상상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전선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것이다. 


*p.s. 간혹 여러분이 보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당당하고 멋진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나와 같은 처지인 페미니스트 제작진의 눈물겨운 사투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


콘텐츠 업계 노동자 / 개복치 5년차 



1) OJ 심슨 사건 

1994년 전처 살인 혐의로 재판 받은 유명 풋볼 선수이자 셀럽이었던 OJ 심슨 사건. 경찰은 심슨이 오랫동안 전처 니콜 브라운 심슨을 폭행해 왔다는 증거를 제출하고, 가정 내 폭력이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했다. 하지만 심슨은 그의 부를 바탕으로 실적이 최고인 변호사들만을 고용해 무혐의 판결을 받아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넷플릭스 'OJ 심슨 파일'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2) 빌 코스비 사건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이자 배우, 작가, TV프로듀서 등으로 활동했던 빌 코스비가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총 36명의 여성을 성폭행/추행했다. 이는 2015년 밝혀졌고, 미국의 시사주간지인 뉴욕 매거진은 이 피해자들의 흑백사진을 커버로 실어 크게 화제가 되었다. 
(기사 참고 : http://news.donga.com/3/all/20150728/72755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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