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분위기 주절주절, 맥락없음
모 언론사는 매일 0시 페이스북에 '오늘의 운세'를 올려주곤 하는데 챙겨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억에 남는 제목은 '84년생 푸른 심장으로 불가능에 도전해요'였다. 세상에. 나는 84년생이 아닌데 나도 푸른 심장으로 불가능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누가 내게 '푸른 심장으로 불가능에 도전해요!'라고 말해주면 얼마나 힘이 날까. 84년생은 좋겠다...
본문을 읽어보니 다 귀엽고 예쁜 말들이다. 60년생 궂은일 척척 우렁각시가 되어주자. 72년생 누구라는 허세 점수만 깎여진다. 85년생 가난이 막고 있던 꿈을 펼쳐보자. 51년생 필요로 하는 자리 기꺼이 나서 주자. 42년생 온 가족 경사에 춤사위가 절로난다. 02년생 진지한 눈빛으로 서로를 안아보자. 93년생 언제나 웃음 주는 부름에 나서보자. 70년생 아름다운 정성은 선물이 되어준다... 좋다. 묘하게 따뜻하다. 착착 감기는 리듬감 위로, 저 예쁜 단어들을 어찌하면 잘 쌓아볼 수 있을지, 끄으응 골몰하는 누군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꼬리가 초승달이 된다.
쉽게 생각해보면 하루하루의 운이라는 게 어차피, 저런 좋은 생각 마음에 담고 예쁜 말 착한 짓 하나 더 하면, 저절로 복덩이가 굴러들어오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게으른 생각이지만 그까이꺼 좀 게으르면 어떤가? 항상 뭐가 엄밀해야 하고 치열해야 하고 적절하면서도 정합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다가 이도저도 다 놓쳐버리는 일도 가끔, 아니 꽤 있지 않은가. 생각과 말의 게으름이란... 생각과 말이 게으르냐 부지런하냐보다는, 그 생각과 말이라는 것이 누굴 보듬는 것인지 다치게 하는지가 조금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이 또한 나무늘보 같은 상상이겠지만, 때로는 봄날 햇살 아래 나무늘보처럼 머어엉 흘려보내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믿는다. 특히 우리에게는.
그나저나 푸른 심장이란 뭘까. 아마도 청춘의 상징색인 푸름을 심장에 붙인 비유기법인 것 같지만 나는 처음 저 제목을 봤을 때 알코올램프의 푸른 불꽃을 떠올렸다. 심장이랑 크기도 비슷하고. 만약 뜨겁게 도전한다는 개념을 전달하려 한다고 해도, '뜨거운 심장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라'고 쓰기보다는 역시 '푸른 심장으로 불가능에 도전해요'라고 하는 쪽이 더 멋진 글쓰기 아닐까 싶다.
‘아닐까’ ‘싶다’ ‘그런 것도 같다’ ‘그럴지도 모른다’... 요즘 부쩍 이런 말을 자주 쓰게 된다. 요새는 내 문장 위에서 어떤 것도 단정하고 싶지가 않다. 나는 글쓰는 일을 하고 있지만, 하면 할수록 ‘내가 뭐라고...’라는 생각밖에는 도무지 들지가 않는다. 심지어 최근에는 칼럼은 물론 기사에서까지 모른다는 말을 쓰고 있다. 모르는 기자라니... 충격! 모르는 기자가 있다?! 독자들은 실망하겠지만 어떡해... 아는척하기도 싫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더 싫고... 형식적인 면에서 봐도 기껏 주절주절 글 잘 써놓고 마지막 문장을 (문처럼)쾅 닫아버리는 건 어쩐지 조금 미안스럽다. 정확하게는 내 글이, 독자를 훈계하고 다그치는 심판관처럼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을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얼굴은 못생겼다. 나는 안 예뻐도 나의 글은 예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다들 기자에겐 그런 엄근진한 걸 원하는 것 같고 기자들도 대개는 그렇게 글을 쓴다.
모르겠다. 이건 이거다 저건 저거다 이래야한다 저래서는안된다 늘 명쾌하고 확고하게 말하는 다른 기자들 사이에서, 기자초년병 시절에는 솔직히 조금 주눅도 들었더랜다. 깊이 알지 못한 채로 덜커덕 뛰어든 탓이다. 빼어나고 예리하고 대쪽 같은 사람들이 드글대는 기자세상에서 처음엔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어울리지 않는 파티장에 갑자기 초대돼 어색한 어깨춤을 추는 느낌도 들었다. 그분들에 견주면 사명감 정의감 같은 것도 나는 좀 애매한 것 같고... 치열하게 쩌널리즘이나 정의 같은 걸 고민하기엔 나는 쏘주가 너무 달큰하고 서로 놀려먹으면서 농담따먹는 게 제일 재밌는 걸 어쩌나.
지금은 그때처럼 주눅들진 않는다. 정답을 찾았다기보다는 사실 시간이 이쯤 지나니 꽤 뻔뻔해져서, 그냥 적응 안하고 내맘대로 해보려고 노력중이다. 나같은 사람도 하나 있으면 좋지 하는 마음으로. 이러다 짤리면? 몰라ㅎㅎ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까지의 삶처럼. 어쨌거나 만약 내가 이 판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의든 타의든 언젠가는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왔을 때 어떤 감정을 느낄지는 그때 가봐야 알 테지.
'푸른 심장으로 불가능에 도전해요'가 해요로 끝나서 더 마음이 간다. '도전하라'는 재수없고 ‘도전하자’는 별루다. '왜 도전하지 않는가-!'는 최악이다. '도전해보면 어떨까요?'도 조금 별로다. 속내는 결국 '도전하라'면서 짐짓 아닌척 하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