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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Aug 04. 2023

D의 단어장

어느 이주노동자의 봉고차에서

D는 오른손으로만 핸들을 돌렸다. 그의 왼쪽 손은 살구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의수(義手)였다. 필리핀에서 돈을 벌려고 한국에 왔다는 그는 낡은 봉고차를 운전하는 내내 플라스틱제 왼손을 허벅지 위에 놓아두었다. 덜컹거리는 핸들을 한 손으로 잡고 경기도 곳곳을 돌면서 식품매장이나 식당에 동남아 식재료를 납품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지난 11월 내가 D의 낡은 봉고차 조수석에 타게 된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지인인 R이 당한 사고 때문이었다.


D는 나를 태우고 R이 일하던 공장으로 향했다. R은 필리핀 출신으로 17년 전 한국에 왔다. 여러 공장을 전전하던 R은 8월쯤 경기 북부의 한 산골에 있는 작은 섬유공장에 취업했다. 섬유공장은 업종 특성상 계속 돌아가야 했다. 주 6일 하루 13시간씩 홀로 야간노동을 하며 기계를 지키던 R은 지난해 10월 말, 기숙사 원룸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D의 낡은 봉고차는 시내를 금세 빠져나와 비닐하우스 수백 채가 주욱 깔린 들판을 가로질렀다. 차 안에서 나는 D에게 R이 왜 그렇게 일할 수밖에 없었는지 물었다. R은 미등록 이주노동자였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고 D는 말했다. 당장 돈이 급한데 일할 곳은 없으니 힘들고 고된 일을 하게 된다고 했다. 사장들도 그런 처지를 악용해 법의 선을 넘는 장시간·고강도·저임금 노동을 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밤에 일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D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낮에는 단속사람들 나와요.”


‘단속사람들’. 처음 들어보는 합성어가 머리를 화살처럼 관통해 박혔다. D와의 동행은 20분 남짓이었지만 저 단어 하나가 지금까지도 마음속을 맴돈다. 경찰도 공무원도 아닌 ‘단속사람들’이라니. 나를 위협하는 이의 직책과 이름은 몰라도 그 존재만큼은 뚜렷해서, 그들을 부를 말을 찾다가, 짧은 한국어로 어설프게 기워 만들었을 그 단어. 길지 않은 D의 단어장에 유독 굵은 글씨로 적혀 있을 그 말.


D가 떠올리는 ‘단속사람들’은 어떤 얼굴이었을까. 한 번도 ‘단속사람들’을 피해 도망다녀 본 적이 없는 나는 쉽게 상상할 수 없다. 다만 흐릿하게 그려본다. 부라린 눈과 치켜올려진 눈썹, “저놈 잡아!”라고 외치는 두꺼운 입술 같은 것들을. 무시무시한 그 얼굴은 어쩌면, D나 R 같은 사람들이 매일 마주치는 ‘한국사회’의 표정일지도 모른다.


법무부는 지난해 7월 기준으로 국내 미등록 외국인이 39만 5,068명이라고 집계했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약 205만 명의 20%다. 한국과 ‘단속사람들’은 그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쫓아내기 바빴다. 임금을 뜯기고 추위에, 산재에 죽어가도 방치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등록’이 말소되는 순간 마술처럼 가능해졌다.


아무것도 나아진 건 없는데 정부는 비자를 찍어내 역대 최대 규모인 11만 명을 들여온다고 한다. 한 국회의원은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100만 원에 쓸 수 있도록 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일 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모두가 ‘웰컴 투 코리아’를 외친다. 그렇게 한국에 와서 일하던 중 어쩌다 미등록이 되어버리면, 어디선가 ‘단속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 수갑을 채울 거라는 사실은 숨긴 채. 이미 3월부터 법무부와 경찰청 등 5개 부처는 미등록 이주민 합동단속을 벌이고 있다.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D의 안부를 생각한다. ‘단속사람들’을 마주치지는 않았을까. D의 머릿속 단어장에서 ‘단속’이 지워지고 ‘사람’만 남는 날이 오기를, 홀로 바라고 있다.


이 글은 한국노총 전국공공산업노동조합연맹 노보 <공공노동자> 11호(2023.04)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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