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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Oct 15. 2023

소쩍새 울 때면 할머니도 울고

가방끈, 그 서러움에 대하여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교과서 종이 위를 가로지르는 서정주의 시구(詩句)를, 일흔 살 이모씨가 소리내 천천히 따라 읽는다. 늦은 배움을 시작하는 이들이 모인 한 평생교육시설. 이씨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머리가 희끗희끗한 여성들이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봄부터 소쩍새는…”


이씨는 숨을 고른다. 1960년대 초 시골 마을, 농사를 돕던 어린 시절로 이씨는 돌아간다. 총명한 소녀였던 그의 손에 어느 날 한문책 한 권이 우연히 들어왔다. ‘하루에 딱 여덟 자만 외우자’는 마음으로, 소를 먹이러 다니며 소녀는 매일 글자들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가족의 반대로 상급학교 진학은 포기해야 했다. 여자라면 으레 그런 줄로 알았다.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교실에서 시를 읽다가 이씨는 울고 만다. 시계는 다시 몇십 년을 거꾸로 돌고, 1970년대 대구의 한 자취방이 펼쳐진다. 이씨와 달리 고등학교에 진학한 남동생이 책상 앞에 앉아 국어 교과서를 읽고 있었다. “한 송이의…” 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함께 대구로 와 있던 이씨는 동생이 읽던 그 시를 어깨너머로 외웠다. 

80대 만학도가 2017년 8월 24일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원서를 접수하고 있다. 강윤중 경향신문 기자

50년이 흘렀고 이씨는 억척같이 살아 자녀도 번듯하게 키워냈다. 배움을 놓아버린 한이 마음으로 밀려왔다. 큰마음 먹고 입학한 평생교육시설에는 수많은 이씨가 앉아 있었다. 어느 날 강단에 선 국어 선생님이 물었다.


“‘국화 옆에서’, 이 시를 아는 분이 있나요?” 


남동생의 웅크린 등 건너로만 봐 오던 그 시. 이씨는 손을 들었다. ‘한’과 ‘송이’와 ‘국화꽃’을 건널 때마다 사무침이 한 번, 설렘이 한 번, 서러움이 한 번씩 이씨의 목 끝을 흔들고 지나갔다.


만학도인 이씨를 인터뷰한 지 벌써 3년이나 됐다. 전날 수능을 치르고 왔다는 그는 ‘국화 옆에서’를 읽던 국어시간을 말하면서 조금 울컥했다. 그의 기쁨을 축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흔 평생 그를 서럽고 부끄럽게 만들었을 이 사회의 어떤 모습들이 미워졌다.

가방끈과 졸업장을 유달리, 과하게 사랑하는 ‘먹물 숭배’ 사회에서 이씨 같은 이들은 자꾸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사회에선 ‘교양’도 학력처럼 종교가 되곤 한다. 


책의 정신보다는 문화자본으로서의 상징성만을 숭앙할 때, 책은 자주 ‘구별짓기’의 수단이 된다. 해외 출장을 떠나는 정치인들은 언론 카메라에 잘 잡히도록 옆구리에 인문고전을 전시한다. 독서라는 ‘사치’를 부렸다간 미끄러져 버리는 가파른 입시 피라미드를 만들어놓은 어른들이 “요즘 애들은 문해력이 부족하다”며 혀를 찬다. 어떤 문인은 “책을 안 읽은 중년은 시시하다”고 하고, 유튜브에는 “○○○ 읽은 것처럼 해드립니다”라는 영상이 유행한다.


한국이라는 거대한 건물의 구석구석에 이런 정서가 벽돌 사이의 모르타르처럼 녹아 있다. 어쩌면 지을 때부터 그렇게 설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서와 교양이라는 게 타인의 삶에 가닿는 다리가 아니라 남들보다 높아지려는, 또는 높아진 기분을 만끽하려는 욕망의 수단일 뿐이라면. 책이라는 게 내 안의 얼음바다를 깨는 도끼가 아니라 고대 귀족들의 신분과시용 금도끼에 더 가깝다면….

계절도 없이 반복되는 지독한 말들과 마주칠 때마다 3년 전 만난 이씨를 생각한다. 

봄마다 울었다는 소쩍새의 울음을 떠올린다. 


이 글은 <주간경향> 1529호(2023.05.29)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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