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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기자의 긁적끄적 Nov 04. 2023

이 세상의 어떤 말들은 아무리 작게 말해도 비명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유지되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이 세상의 어떤 말들은, 아무리 작게 말해도 비명이다.


“혼자선 못 하겠어요.” 지난달 홀로 엘리베이터를 수리하다 20m 아래로 추락해 숨진 정비사가 사고 직전 동료에게 보냈다는 문자메시지를 전해들었을 때, 귀를 찌르는 비명을 들은 듯 아찔해졌다. 이 나라에는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이라는 문서가 있다. 승강기 수리·점검 작업은 두 명이 하라고 그 문서에 적혀 있다. ‘안전하게 일하는 방법’을 규정한 법과 규칙은 무수히 많다. 다 휴지조각이다.


“혼자선 못 해요.” 7년 전 어느 초여름, 구의역에서 홀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지하철에 치여 죽은 20대 청년 ‘김군’도 같은 말을 했을까. 스크린도어 수리도 2인1조로 규정된 작업이었다. 서울시의 구조조정 압력이 들어왔고, 비용 절감과 외주화를 위해 설립된 업체는 돈이 없다며 사람을 뽑지 않았다고 한다. 다들 돈, 그놈의 돈 아낀답시고 김군을 혼자 선로에 내려보냈다.

ⓒ경향신문

“혼자선 안 될 것 같아요.” 5년 전 어느 겨울, 어두컴컴한 태안화력발전소 안에서 홀로 컨베이어벨트 위 석탄을 치우다가 기계에 끼어 죽은 스물네 살 김용균도 같은 말을 했을까. 이 일도 2인1조 점검이 원칙이었다. 누군가 기계에 몸이 끼이면 다른 사람이 기계를 정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말해서 무엇할까.


“혼자선 어려워요.” 지난해 어느 가을, SPC그룹 자회사 제빵공장에서 홀로 샌드위치 소스를 만들던 중 기계에 몸이 빨려들어가 죽은 20대 청년도 같은 말을 했을까. 경찰 수사 결과 공장 자체 매뉴얼엔 ‘2인1조’가 규정돼 있었다. 살아 있던 어느 날에 그는 같은 공장에 다니는 남자친구에게 이런 카카오톡을 보냈다. “사실 일상이야 헤헤. 내가 이래서 오빠 야간 오지 말라고 한겨. 일 나 혼자 다 하는 거 들킬까봐. 킥.” 세상의 어떤 말들은, 헤헤 웃으며 말해도 비명이다.


사회부 사건팀에서 노동팀으로 옮긴 지 1년이 됐다. 사건팀에 있을 때보다 요즘 더 많은 죽음을 접하는 느낌이다. 숱한 죽음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 번쯤은 꼭 “혼자선 못 하겠어요”라는 비명이 스친다. 현장 생산직 노동자들의 예를 주로 들었지만, 그놈의 돈, 돈, 돈 아낀다면서 한 사람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몰아주는 상황은 사실 사무직이나 판매직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가치’를 위해 일한다는 언론사나 출판사, 학계 등 지식노동자들도 똑같다. 한 해에 과로사로 최소 500명이 죽는다. 이 와중에 “기필코 노동시간을 더 유연화하겠다”며 벼르는 정부 인사들의 말을 들으면, 그냥 모든 걸 다 놓아버리고 싶어만 진다.


취재파일 위로 켜켜이 쌓인 죽음을 매번 힘겹게 떨쳐내고도, 끝내 지우지 못한 질문이 있다. 이렇게까지 해서 한국사회가 이루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무엇이든 그게 있다면, 그건 이렇게까지 해서 이룰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사람을 갈아 죽여가면서까지 우리는 도대체 이 세상에서 뭘 얻어내려는 걸까. 이렇게까지 해야만 유지되는 사회라면….


그놈의 돈, 그놈의 성장. 빌어먹을 그놈의 비용, 이윤, 일, 일, 일.

도대체 왜 이러는가. 혼자선 못 하겠다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이 글은 <주간경향> 1536호(2023.07.17)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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