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람기자의 긁적끄적 Nov 18. 2023

자꾸 하늘을 본다, 종교도 없는데

2023년 여름,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대학에 복학했을 때 학교 앞에 저가형 테이크아웃 카페들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단칸방처럼 좁은 점포 안에는 알바생 한두 명과 커피머신·냉장고만 있고, 손님은 가게 밖 키오스크를 통해 아무 대화 없이도 커피를 살 수 있는 그런 가게들 말이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다. 늘 누군가와 눈을 맞추며 말로 커피를 주문했는데, 기계 조작 몇 번으로 ‘카페 커피’를 살 수 있다니. 마치 사람이 들어간 자판기를 이용하는 것 같았다. 가끔은 사람이 기계 부품이 된 풍경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불쑥불쑥 들곤 했다.


그때마다 성가신 파리를 쫓아내듯 상상을 치웠다. 땀흘려 일하는 이들에게 실례인데다 왠지 ‘오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로 일을 시작하고, 해는 2023년이 됐다. 이 직업이 아무래도 기쁜 일보다는 슬프고 아픈 일을 더 많이 접하기 마련이다. 연차가 쌓일수록, 세상은 꾸준히 더 나쁜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기계 부품 같은 무정물의 신세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순진한 믿음을 잃지는 않았다. 자주 위태로워지는 믿음이었지만 그걸 지켜야 뭐라도 할 수 있을 듯했다.


알량한 믿음은 올해 여름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들려온 소식에 무너졌다. 학부모의 갑질에 시달린 20대 교사가 학교에서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교사들의 입에서 그들이 그동안 당해 온 수많은 갑질 사례가 쏟아져 나왔다. 둑이 터지듯 폭발한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천천히 읽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기계를 다룰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뜻대로 안 된다며 부품을 툭툭 치고, 발로 차고, 때려도 보는 그 행동들이 겹쳐 보였다. 사람은 이미 기계 부품이었다.


다시 보니 온 세상이 기계 부품 때리는 소리였다. 공무원과 민원인, 상인과 손님, 콜센터 상담원과 고객님, 사장과 직원, 장교와 사병, 농장주와 이주노동자까지.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사람 대 기계 부품, 사람 대 무정물의 관계에서나 가능할 일들이 매일 벌어졌다.


인격을 빼앗긴 채 무정물의 위치에 놓이고 끝내 스스로를 놓아버린 많은 ‘을’들을 기억한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조차 적군 병사의 눈동자를 마주보면 방아쇠를 당기기가 망설여진다는데, 우리는 왜…. 도대체 뭘까. 나는 샀으니까 괜찮다는 걸까. 서비스를 샀든 고용관계를 샀든, 나는 샀고 권리가 있으니까. 말하자면, 너를 ‘사용’하니까. 너의 인격 같은 건 구입하지 않았으니까.


현실 속에서 해답을 찾아보고 싶어서 전문가들의 진단을 열심히 읽어 본다. 그럴듯한 말들에 고개를 끄떡이다가도, 자꾸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게 된다. 종교가 없는데도 요즘은 자꾸 하늘을 본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자는 말.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는 이 말부터 다시 해야 할 지경에 우리는 이르고 만 것일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따로 기사에 적지도 않았던 그 말을. 무언가를 새로 다짐하기조차 힘겨운 8월이 흘러가고 있다.


그나저나 하나만 묻고 싶다.

기계 부품이 힘들어하면 무엇이든 조치를 취하면서, 사람이 힘들어할 땐 왜 아무 조치도 안 하는가?


이 글은 <주간경향> 1542호(2023.08.28)에도 실렸습니다.

(메인 이미지 ⓒ경향신문)

매거진의 이전글 이 세상의 어떤 말들은 아무리 작게 말해도 비명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