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히지 않으면 되는데
노동 기사의 카테고리는 다양하다. 노동정책, 고용시장, 노사관계, 임금·노동시간, 산업안전…. 기사의 주제에 따라 각기 다른 상황의 사람들을 만난다.
수많은 유형의 ‘당사자들’ 가운데서도 직장내 괴롭힘 피해자들은 유독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들은 인터뷰에서 반드시 운다. 지금까지 예외는 없었다.
아무리 취재파일이 쌓여도 그 개별적인 울음과 비명 하나하나를 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영혼이 조각나고, 행복이 질식하는 소리를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한 화장품 회사 직원은 출근길 KTX에서 ‘살려주세요’라는 자신의 비명에 잠을 깬다며 울었다. 회사에 갈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심장이 뛴다는 말은 예사다. 회사가 지옥 같습니다, 너무 힘듭니다, 죽고 싶습니다, 또는 살고 싶습니다…. 노동인권단체 직장갑질119의 설문을 보면 직장인 3명 중 1명이 괴롭힘을 겪는다고 한다. 주변인들의 삶도 당연히 쑥대밭이 된다.
직장내 괴롭힘은 ‘괴롭힘’이라고 불리지만, 단순히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정도에 머무는 개념이 아니다. 근로기준법상 직장내 괴롭힘 구성요건에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이 있다. 고통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폭력이고, 학대다. 어른들이 저지르는 학교폭력이다. 학교폭력이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처럼, 2021년 업무상 정신질환으로 인한 극단적 선택으로 산재 신청을 한 사망자는 158명에 달했다.
피해자들은 ‘직장생활을 잘하고 싶었다’고 입을 모은다. 그 평범한 소원은 짓밟아버린 행위자들은 자신들이 ‘그래도 되는’ 온갖 이유를 붙인다. 주로 피해자가 업무에 미숙하다거나 조직문화에 적응을 못 했다는 변명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그저 ‘먼저 들어왔으니까’ 당연히 보이는 것을, 조금 늦게 들어온 피해자가 모른다는 이유로 괴롭히는 경우다.
정말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대도 해결방법은 괴롭힘 외에도 많다. 모든 사고는 정확히 그만큼의 책임을 지는 것이 원칙이며, 그 범위에 인간적 모멸과 모욕은 포함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타인에게 고통을 줄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래서 묻고 싶다. 이 당연한 말이 어렵냐고. 괴롭혀서 속이 시원하고 행복하냐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선 발 뻗고 자는 그 잠자리는 따뜻하냐고. 혹시 언젠가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양심의 소리에 잠 못 이루냐고. 괴롭히지 않으면 되는데, 그게 당신들은 그렇게 어려웠냐고.
이 와중에 정부가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을 다듬으려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괴롭힘 판단 기준을 명확히 하겠다고 하지만, 괴롭힘의 법적 기준이 후퇴할지 모른다는 소문도 함께 들린다. ‘강도에 따라 3개월 이상 지속해야 인정’ 같은 말이 돌고, ‘허위신고가 많다’는 주장이 정부 후원 토론회에서 고개를 들었다.
허위신고가 없진 않을 것이다. 명확한 기준을 원하는 조사 실무자들의 마음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논의의 끝이 몇 달 전 ‘시럽급여’, ‘샤넬’ 같은 악의 가득한 말들로 국민을 몰아세웠던 그때와 포개진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
물론 아직은 두고 볼 일이다. 다만 논의 참여자들이 잊지 않았으면 한다. 포털 뉴스 검색창에 ‘직장내 괴롭힘 극단 선택’을 검색했을 때 펼쳐지는 끔찍한 광경을. 믿을 수 없이 촘촘한 그 날짜들을.
이 글은 <주간경향> 1555호(2023.12.04)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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