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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ul 24. 2018

1904, 흐르는 섬 가덕도_김영수님

율리 마을 김영수님

인터뷰 영상 링크


https://youtu.be/99F8Et_Tt20








율리 김영수 (82세) _ 고기를 잡아 영화 사업을 하다

     

가덕도에서 12대를 사셨다는데,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우리 아버지는 가덕도에서 최고 명필이었는데, 내 열두 살에 아버지를 잃었어요. 나는 8남매인데, 내 위의 형은 일찍 가버리고, 밑에 동생들이 여섯이었어요. 내가 장남 역할을 해야 하니 일찍 일을 하러 갔지요. 그때는 집집마다 애들 7-8명씩 낳는 건 보통이었어요. 10명을 낳으면 일본 놈들이 광목 한필을 주기도 했어요. 그렇게 낳아서 병나면 약이 있나 병원이 있나, 반은 죽고 반은 사는 거지요. 배 아프면 칡이나 쑥 먹는 게 약이고, 몸 아프면 쑥뜸 뜨고 하는 게 전부였지요. 저녁 되면 기름이 없어서 대구 기름을 짜서 솜을 비벼 심지를 만들어 불을 댕기고, 등화관제 한다고 문은 이불로 가려놓고, 일곱 자 여덟 자 되는 방에 여섯 일곱 명이 잤어요. 지금 같으면 한명도 못 잔다고 야단 날 방에. 생선 기름은 냄새도 심한데, 그렇게 안할 수가 없었어요.        

     

일제강점기는 어땠나요?

왜놈 순사한테도 뺨맞아봤고, 왜년한테도 뺨 맞아봤어요. 지금 주민 센터 있는데 밑에 있는 파출소, 옛날 그대로예요. 그 앞에 주차장 부지에 돌로 유치장을 만들어 놨었어요. 위에 사이렌 달고. 왜놈 순사들은 긴 칼 차고, 부츠 신고 말 타고 다녔어요. 우리는 짚신, 게다, 초리(일본짚신) 신고. 시집가는 신부들도 미투리 신었어요. 봉채 하고 같이 미투리를 가마에 넣어줬지요. 지금도 난 짚신하고 초리 삼으라면 잘 할 수 있어요. 새끼 꼬아서 지붕 이는 것도 잘 하고요. 7-8살까지 팬티도 없었을 정도니까요. 그냥 핫바지 저고리 입었지요. 일제말기에 고기는 우글우글한데 식량이 귀했어요. 나락을 심으면 열매가 스무 개 서른 개 밖에 안됐어요. 퇴비가 없으니까. 지금은 나락에 열매가 적어도 백 개 이상은 달리거든요. 거기다 배당 공출 댄다고 밭마다 목화를 심어야 했어요. 그걸 가지고 조선베 짜고 광목 짜고 해야 하니까요. 국민학교 2학년 때 학교를 왜놈들한테 내 줬어요. 공부는 남의 묘지에 가서, 논둑에 가서 하고요. 외양포엔 왜놈들 관사가 있었고요. 거가대교 밑이 전부 인공 굴이었어요. 공습을 당하면 전부다 그 안에 가서 숨었어요. 군수품도 갖다 넣고요.

     


조선시대 이야기도 들으셨어요?

아주 옛날에는 지금 농협 있는 곳이 장터였대요. 그 앞에 바닷가에 배 묶는 말뚝이 많았고요. 거기가 아주 넓었어요. 임진왜란 때 조선 함대들이 배를 갖다 대고요. 가덕도에 성이 많았어요. 눌차성, 이성, 천성. 연대봉이랑 천자봉에 봉화를 피우고요. 연대산에는 지금도 해마다 동에서 봉수제를 지내요.

     

가덕도는 어떤 곳인가요?

옛날엔 가덕도가 유명하고 살기 좋은 곳이었어요. 원래 창원군 천가면이었고, 그 전에 일제시대에는 ‘소겡군 뎅까면’이었지요. ‘면장이 군수를 몰고 다닌다’라는 소리도 더러 있었어요. 참 잘 살았지요. 가덕도 앞마다에 말뚝 하나마다 담치(홍합)이 몇 가마가 나왔어요. 고동, 낙지도 많았고요. 가덕도엔 이런 말이 있었어요. ‘죽은 송장이 거제 산 사람 셋을 거둔다’ 그만치 사람들이 똑똑하고 생활력이 강했지요. 여름 되면 숭어, 향어가 앞마다에 팔딱팔딱 했어요. 방파제가 두 개 있었는데, 거기 앉아서 낚시대 던져놓고 소주 마시고 있으면 도다리, 감성어가 쑥쑥 낚였어요. 고기가 그렇게 많은데 어구가 없어서 못 잡을 정도였어요.

     

옛날엔 어떤 소주가 있었나요?

아주 옛날엔 소주를 집에서 담그다가, 해방되고 나서는 부산에서 35도짜리 ‘다이아’가 나오고, 마산 소주  ‘명월’이 제일 귀했지요. 25도짜리.

     

전쟁때는 어땠어요?

6․25때 대구, 부산, 마산, 이 세군데 밖에 안 남았을 때지요. 가덕도에서 봐도 마산 진동까지 인민군이 들어와서 폭격하는 게 다 보였을 정도니까요. 마산에서 가덕도로 배로 피난 온 사람들이 집이 없으니까 솔가지로 움막을 쳐서 살고 그랬어요. 그때는 풍선이나 노 젓는 배 밖에 없었어요. 그걸로 앞마다에 멸치, 갈치 드는 거 잡았지요.

     

군생활은 어떠셨어요?

박정희가 2군 사령관 이었을 때, 내 군대생활 대장이었어요. 그때 3․15 부정선거가 있었어요. 내가 복무하던 부대가 부산에 있었는데, 군인들을 광안리에 있는 어느 인쇄소에 데려가서 선거를 시켰어요. 칸으로 사방이 막혀 있는데, 벽마다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어요. 찍으라는데 찍어야지, 다른데 찍으면 밖에서 구멍으로 보고 있다가 ‘어데로?’하고 엄포를 놔요. 그럼 어쩔 수 없지. 딴 데 찍으면 그날 밤에 죽어나는 거지요. 그때부터 데모가 일어날 거란 소리는 들렸어요. 그러다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이 시체가 떠올랐지요. 그리고 4․19데모가 마산에서 처음 일어난 거지요. 참 역사적인 이야기 인데, 그걸 군대에서 다 겪었어요.   

     

제대하고 어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군요.

어릴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14살 때 강원도에 명태 잡으러도 가봤고, 강원도 속초, 연평도까지 올라가봤어요. 16살 때부터 나무 장사도 했어요. 제대하고 나서 고기잡이를 본격적으로 했지요. 가덕도에서 고기를 잡으면 바지기(지게에 얹는 소쿠리)로 지고, 여객선으로 판매를 했어요. 바람이 불어서 객선을 못타면 풍선으로 노를 저어서 용원으로 건너가요. 용원에서 버스를 타고 구포에서 내려 고기를 상자에 넣어가지고, 남포동 가서 팔고 오고 그랬어요. 그래가 돈도 많이 벌었어요. 그때 남자 인건비가 쌀 두되, 여자는 쌀 한 되. 그래도 잘 모으고 살았는데, 장항 부락에 있는 사람이 피조개를 시작했어요. 그 사람이 진해 속천동에 가서 피조개 종패를 백만 원어치 사서 넣으니까, 10개월 만에 캐니까 천만 원어치가 올라와요. 그걸 보고 내가 4천만 원 어치를 넣었어요. 이거만 잘 되면 한방 쥔다 했는데, 여름에 비가 와 강물이 들어서 다 죽어버렸어요. 그길로 바람이 나서, 우리 처남이 영화사를 하고 있었거든요. 처남 소개로 영화 사업을 시작한 거지요. 피조개 사업을 그렇게 내삐리고 나니, 에이 함 바까보자 싶어서 영화로 바꾼 거예요.

     



어업해서 영화 사업을 하셨군요?

영화 제작은 다했는데 2년 동안 부도위기에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애들은 정부미를 먹이고. 그래서 영화 사업을 접고 가덕도로 돌아온 게 내가 40대 초반이었어요. 가덕도 도로 들어와서 새조개를 했지요. 20일 작업해서 하루에 5억 올라오는 날도 있었어요. 그걸 일본으로 보내고요.

     

영화 사업할 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부영빌딩 7층이 내 사무실이고, 칵테일, 배트맨, 작품이 많았어요. 그 바람에 빌어먹었어요. 그걸 안했으면 가덕도에서 2등 가는 부자가 되었을 건데. 하루에 커피를 20잔씩 마셔가며 손님 대접하는 날도 있었고, 남포동 깡패들이 극장 앞에 서성거리면 공짜로 영화 보여주고, 배고프다면 국수 한 그릇 사주고, 술에 취해서 다니면 택시 잡아서 집까지 태워다 주고, 그렇게도 살아봤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의원 출마했었을 때 나랑 같이 가덕도도 돌고, 식은 밥에 불상추 싸셔도 잡쉈어요. 소주도 한잔씩 서로 주고받고.

     

가덕도에 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요?

신항 때문에 어업이 중단되어서 분통이 터지지요. 학교 폐교 다 되고, 애 낳을 젊은 놈 하나 없고. 50대도 밖에서 들어온 사람 아니면 없어요. 고기잡이가 여전히 잘 되면 대학공부 시킨 자식들도 다시 돌아온 다고요. 가덕도 사람들은 욕심이 없어요. 세상 가는 줄도 모르고요. 생계대책이라고는 하나 못 받고.                 

     

     




1904, 흐르는 섬 가덕도

     

기획  부산광역시 강서구 문화체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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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김유리

원고  김유리

영상  문창현

사진/업로드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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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에 딸린 텍스트는 저자,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다양성출판사 키스더북스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 영상의 모든 인터뷰는 인터뷰이와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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