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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ul 24. 2018

1904, 흐르는 섬 가덕도_박정출님

외양포 마을 박정출님

(인터뷰 영상 링크)


https://youtu.be/djdPVKjGhQc











외양포 박정출(80세) / 여성 _ 딸을 업고 개발했지요

     

     

어르신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이름은 박정출이고, 호적에는 39년생으로 되가 있어요. 원래 나이는 팔십이 넘었어도 호적대로 해야 할 거 아니가. 외양포에서 태어나지는 않았고, 천성쪽에 있는 두문에서 태어났어요. 천성 초등학교 있었고, 천가동에 중학교 있었고 한 거기. 거기서 자라서 이리 시집을 왔지요. 여기가 외양포 동네예요. 옛날에는 의창군으로 되어 있었어. 이제는 부산시로 돼서 그렇지만. 나는 막내였어요. 우리 어머니가 사십 여덟 살에 나를 낳아가지고, 금이야 옥이야 키워가지고, 사람 좋고 똑똑한 군인이 외양포에 있다고 중신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여기 동네로 시집을 왔잖아요. 결혼할 당시에는 제대를 했고, 해병대 11기라카데. 살았으면 나이는 팔십 여덟 살. 우리 시누이가 율리 사는데 소개를 시켜줬지. 대항 김가들 집이 똑똑하고 그래서 시집을 보냈는데, 내가 복이 없어서.

     

남편은 언제 잃으셨어요?

내가 스물에 시집을 와서, 딸이 세 살 먹어서 저거 아버지 죽었다 아이요. 옛날 사람들은 일찍 결혼해도 혼인 신고를 안 하잖아. 내가 딸 한 개 가지고 무슨 짓을 하고 안 살았겠어요. 말도 못 한다. 내 홀로 일만 하고 이렇게 살았는데, 우째 다리가 성하겠노. 앉아도 무르팍 굽히지도 못해서 이래 펴고 안 있어요. 그래도 후회 안 해요. 나는 살아 놓으니깐 좋은 것도 먹고 좋은 것도 보고 딸이 싣고 오고 싣고 가고 이러는데, 우리 일찍 죽은 수남이 아버지는 너무 불쌍해서 생각만 하면 눈물 나요.

     

어쩌다 돌아 가셨어요?

군대에 오래 있었어요. 전방에만 있었는데, 그때도 암인 줄 알았어요. 그때는 내가 시근이 없어서 몰라도, 화학 설탕 같은 그런 가루들을 먹으니 어찌 그런 병이 안 걸리겠어요. 남편이 있었으면 내 이렇게 살지도 안 해요. 그 똑똑한 사람 세상 버렸는데, 내가 복이 없어서 그렇지요. 혼자서 딸아 키웠어요. 저 쪽 보면 빨간 페인트 칠 된 집 안 있더나, 낚시 가게 붙었고. 그게 다 내 집인데, 내가 다리 수술하고 나서 세를 줬더만, 장사 안 된다고 저렇게 문 닫고 있고.  

     

시집올 때 뭘 들고 오셨어요?

살림살이. 옷하고 고리, 삽자리(돗자리의 경상남도 방언)같은 걸로 만든 그런 고리. 시집올 때 배로 안 오고 뭍으로 걸어왔어요. 산을 넘어서. 올 때는 여러 명 같이 와요. 옛날로 치면, 대빈도 있고 웃각시도 있고, 상객은 아버지랑 오빠랑 데리고 왔지. 그렇게 신부를 데려다 주는 거예요. 나 혼자 오지는 안하지. 그 전에 선은 봤는데, 같은 한방에서 처녀 총각이 같이 안 봤지. 어른들이랑 가족끼리 보는 거지요. 우리가 좋다 싫다 하더라도, 부모가 하라고 하면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라고 딸이 바로 생겼지요. 올해 딸이 육십 살이라. 시집 와 보니 시어머니는 막내 시누이 14살에 돌아가셨고, 시아버지는 재혼을 해가지고 우리 시어머님이랑 같이 살대요. 시집살이를 안했어요. 시아버지도 내 시집오고 나서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는 딴 데로 시집을 가버리고.

  



외양포에서는 어른이 돌아가시고 나면 장례를 어떻게 치러요?

땅에 묻었지요, 뒷산에. 먼저 간 우리 신랑은, 우리 시할머니 자식이 없다는 걸아니까, 할매 발밑에 묻어 달라대요. 그 땐 왜 그러는 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자식이 없어가지고 벌초할 사람이 없다고, 벌초하러 오면 자기 묘도 같이 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것 같애요. 암으로 죽어놓으니 병원 생활을 9개월 하다가 병원서 안 된다고 데리고 가라고 하데. 돈 다 까먹고 없으니깐 삽자리 곽(갈대로 만든 곽)이라도 해서 할매 발밑에 묻어줬지요. 우리 집에서 보면 그 묘들이 다 보여요.

장례를 할 때요, 고종사촌, 시숙들이 다 똑똑했거든요. 옛날에 가덕도에서 면장 했던 분들이라. 사흘 동안 다 모여서 식당에서 밥하고. 군대에 오래 있어서 그러는 가, 태극기를 가슴에 붙여 달라 하대요. 광목으로 만든 태극기를 곽 안에 넣어줬어요. 그러고 나서 난 태극기 안사요.

     

장례 절차는 어떻게 되는가요?

문상객들은 마당에 앉아 있고, 시신 나갈 때는 언제 나간다, 하고 그런 게 안 있는가베. 아직 안 나가고 있을 때는 식당 모양으로 국 끓이고 밥하고, 들여다보는 사람 다 먹이고 갈 때는 상여를 메고, 그래 산 위로 간다 아니가. 상여를 열두 명이 메요. 시뻘건 줄로. 무겁든 작든 열두 명 메요. 양쪽으로 여섯 명씩, 열두 명.

     

딸 혼자 키우느라 힘드셨겠어요.

업고 일을 했지요. 딸을 업고…… 목이 메서 말을 못 하겠다(울음). 업고 나무하고, 업고 개발(해산물을 채취하는 일)했어요. 물에 가서 파래도 뜯고, 톳나물, 우뭇가사리 뜯고, 두문서 태어났으니 내가 헤엄을 조금 칠 줄 알았거든요. 해녀 배운다고 달밤에, 굴 껍데기가 하야니까, 그거 물에 던져놓고 건지는 거 배우고, 고무옷 입고 작업 좀 하다가 못해서 말았어요. 그래 산타다가 물 타다가. 그런데 딸이, 밥을 못 해줘서 굶어도 학교를 가려하는데 어쩌겠어요. 공책, 연필 살 돈도 없어서 해병대 애들이 노트를 사 주대. 남편이 해병대 출신이라고. 담요도 주고. 그래 내가 살았다 아니가. 그래 산 건 후회 없어요. 내가 복이 없어서 그렇게 남편을 떨궜는데 후회를 해서 뭐 할거요. 어쩔 땐 세 살짜리를 이웃집에 떼어 놓고요. 어머니가 없으니 애가 따뜻한 거라도 제대로 먹었겠나. 그래도 수남이가 참 똑똑했어요. 대항국민학교 졸업할 때, 경상남도 교육상 1등, 김수남이 받았어요. 머리가 참 좋은 애라. 부모 노릇 못 하고 대학을 못 보냈어요. 고등학교까지 밖에 못 보냈어. 말이 대항이지, 한 동네거든. 우리 주민등록상에서는 외양포로 안 되어 있거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것들 딸 애 공부시킨다고 흉도 많이 보대요. 밥 먹듯이 굶었어요. 지금도 내가 어째 지내는 가 싶어가지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와요. 딸이 덕문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공부 잘 했고, 가덕도 나가서 지가 벌어가지고 대학도 나왔어요. 나도 여기서 좀 도우고. 지금 내가 한이 맺히는 게 돈 많이 든다고 소풍갈 때 김밥 한 번 못 싸준 거. 수남이 아들, 딸들한테 그 얘기 하면, ‘없으면 라면 사서 끓여주지’ 그러거든. 그러면 내가 ‘라면이 그때 있었나’ 그런다. 여자한테 필요한 것들도 옳게 못해줬어요. 지가 우째 감추는지 다 알아서 하고. 가제베(거즈면) 안있는가베, 그거를 겹쳐가지고 속옷에 시쳐(꿰메)줬어요.  

     




사위는 언제 보셨어요?

딸이 23살에 결혼했어요. 사위는 8년 전에 심장마비로 죽었고요. 내 음력 생일이 정월 13일이거든. 우리 사위 제사도 13일이예요. 안 잊으라고 그랬는가. 사위도 가덕도 사람이에요. 저 새바지(대항) 사람.

     

어머니 진짜 고생 많이 하셨어요.

말 못해요. 옛날에 산에 보리똥(보리수 나무 열매) 안 있어요, 봄에 붉게 열리는 거. 그거를 봄에 따서 김해로 팔러 다니고, 미역도 팔러 다니고. 생미역을 한 가마니 받아서 이고 다녔으니 어찌 됐겠어. 내 많이 울고 다녔어. 내 눈물을 모았으면 외양포 앞바다, 이것도 부족해. 내 육신만 허락한다면, 딸을 데리고 산다는 결심을 하고 살았어요. 우리 신랑이 죽기 전에 ‘네가 수남이만 데리고 살면 죽은 영혼이라도 도울란다’ 이랬거든. 죽어도 같이 산다, 살아도 같이 산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외양포 살면서 제일 불편했던 점은 뭔가요?

나무 해다가 군불 때는 거, 그게 불편했지요. 저기 저 굴(외양포 일본군 포진지)위에, 산불감시초소 있는 거기가 우리 밭이거든. 그 때는 비료도 올케 없고, 비료 살 돈도 없고 거름도 아닌 걸 갖다가 똥 구더기에다가 물을 퍼 부어서 물 그거, 뻘건 그 물을 거름 되라고, 저기 가이단(계단)이 촥촥 안 되어 있던가요, 그 가이단에 똥물 그걸 다 엎지르고. 그래 해도 우리 딸은 호멩이(호미의 방언)한 개, 풀 하나 안 시켰어요, 내가 다 했지. 손 밑에 흙 한 번 안 닿게 했어. 막 죽자 살자 공부만 했었지. 밥을 안 먹어도 학교 가려하는데 뭐. 우리 신랑 유언이, 화장 하지 마라 그러대. 그래도 나는 죽으면, 돈이 없어서 못 하면 나무 서너 짐 해다가 우리 자갈밭에, 바닷가서 화장해 달라고 수남이한테 그랬거든요. 그런데 뭐 손톱도 안 들어가요. 그렇게는 안 할라 해.

     

가덕도에서 남자로 태어났으면 어땠을 것 같아요?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소리 치고 살았지. 내가 거세요. 거세니까 이래 살았지. 내가 자그마한 구멍가게도 했거든. 구멍가게도 하고. 배표도 팔고. 내가 지금도 술 일절 먹는 사람이 아니에요. 한 잔 먹으면 사람들이 함부로 볼까봐. 장사할 때 ‘니 술 취했다’ 하면 내가 딱 멱살 잡고 니 같은 거 상대 안한다고 발로 팍 차버리고 싸움도 많이 했어, 남자들하고.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통쟁이 할매’라고 하지만, 그때는 내보고 ‘욕쟁이’라고 그러대. 내가 바른 말 하거든. 저 게 저 길을 가면 안 된다 싶으면 너 그래선 안 된다 이러니깐 통쟁이라고. 내가 말이 거칠거든. 상대방이 들을 때는 꼭 성내고 말하는 것 같거든. 나는 좋게 한다하는 말이. 내가 드셌어. 웬만한 남자들 나한테 못 덤벼들었어. 안 그랬으면 저 울도 담도 없는 집에 살았겠소.  

     



그 집에 특이한 게 있다면서요?

처음에 시집을 오니까, 저 옆에 일본군 헌병대 팻말 안 있던교, 우리 집안에 굴이 있대. 죄 진 사람 거기 가두는 데 인가 보더라고. 시멘트로 딱 해가지고 있대. 사람이 서지는 못 해도 세 명은 앉겠대. 일본군들이 잘못해서 벌을 서게 되면 그 굴 안에 몇시간이고 넣었다 하대요. 요즘에도 집 문을 잠가 놓고 나와요. 관광하는 사람들이 그 헌병대 팻말보고 뭐라도 있는가 싶어서 문을 열다가 문이 망가지면 내 혼자 못 고친다아이요. 인자는 별로 안 그러는데, 팻말 붙인 당시에는 노크도 없이 철컥 문을 열고 안을 보자고 그러대. 노크를 하고 ‘할매 좀 보입시더’ 하면 없다고 말이라도 해 줄 건데. 그래 내가 그 굴을 없애버렸어. 그걸 묻는다고, 사흘을 고생했어요.

     

다리 수술은 언제 하셨어요?

올해 6년차 되는데, 안 나아요. 너무 아플 때 해서 그래서 안 되는가 보더라. 내가 풍을 한방 맞아서 손도 이렇게 안 떠나. 그러니까 이 쪽 다리가 회복이 안 돼. 통증은 없는데, 다리가 안 오므라지고, 추우면 더 해. 양쪽 다리를 여기서 여기까지 째서 관절 수술을 해 놓으니, 무릎이 시려서 핫바지를 입고, 시내라도 나가려고 하면 내복을 두 겹 씩 입고 다녀요.

     

만약에 어머니가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요, 이제 막 남편 죽고, 젖먹이 딸 있고 이런 23살의 내가 있어요, 젊은 나한테 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나처럼 살지 말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어요. 내가 살아 온기, 한이 되니 그렇지, 내가 신랑을 옳게 받아봤나, 안 그래요? 앞으로 남은 인생, 지금 내가 육신을 못 쓰는데, 안 아프고 죽는 사람 어디 있는교, 그냥 요만 이래 살다가 혼자 다 짊어지고 죽는 게 소원이요. 지금도 ‘수남이 아버지, 내 데리고 가입시더’해요. 한 사나흘 살다가 죽는 게 소원이요.








1904, 흐르는 섬 가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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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김유리

원고  김유리

영상  문창현

사진/업로드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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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의 모든 인터뷰는 인터뷰이와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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