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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ul 24. 2018

1904, 흐르는 섬 가덕도_박삼석님

항월마을 박삼석님

인터뷰 영상 링크


https://youtu.be/8is8dzhJPQE









항월 박삼석 (71세) / 남성 _ 굴 껍데기로 매립한 마을

     




어르신이 통장이시죠?

예, 박삼석 이고요, 1948년생, 일흔하나입니다. 여기는 항월 부락, 항월 마을이고요. 옛날에 부산시 편입되기 전에는 가덕도가 창원군, 의창군이었어요. 부산시로 행정이 변경 되면서 눌차리에서 눌차동이 됐고요. 항월, 이젠 여기가 통이죠, 6통. 나는 6통 통장을 맡고 있고요.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가덕도 살았으니까 오래됐죠. 할아버지, 아버지, 3대째 사는 거네요.

     

예전에 가덕도는 어땠다. 라고 들으신 거 있으세요?

가덕도 안에서 눌차, 눌차에서도 우리 항월 마을이 제일 부자였죠.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굴 양식을 많이 했잖아요. 대항이나 천성 저런 곳은 어촌이라 고기 잡아 먹고 일부 농사 지어봤자 돈이 별로 안 돼요. 마산서 객선이 나오면 요리로 지나가면서 해산물이나 농산물을 싣고 부산 자갈치 가서 팔고, 요새는 중매인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객주들이 부산서 기다리고 있어요. 배가 들어오면 자기 밑으로 들어온 물건들로 객주들이 장사를 했죠. 항월은 살기 좋은 마을이라 돈이 흔했죠. 거가대교 생기고 육지 되고 나면서부터는 천성, 대항 저 쪽이 관광지가 되다보니 아무래도 그 쪽으로 사람들이 많이 가죠. 그때보다 땅 값도 많이 비싸졌어요.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안 오니까 거기보다 발전이 조금 덜 됐죠.

     






굴 양식 한창 할 때 얼마나 했나요?

그 당시에도 굴 양식은 면허지가 있었어요. 수심이 얕다보니 대나무나 말목을 물에다가 박아가지고 그 안에 구역은 내 구역이다, 내가 양식을 한다, 이래 했지요. 그 옆에 사람은 그 옆에다가 하고. 시골에 가면 논이나 밭 있는 것처럼 구역을 정해놓고 거기다 양식을 했어요. 그 걸 권리권이라고 해요. 굴이 잘 되니 사고팔기도 했지요. 1960~197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다 어려웠잖아요. 전쟁 직후니까. 섬에 사는 우리들은 IMF가 어땠는지도 잘 못 느꼈고, 그런대로 먹고 사는 것은 지장 없이 잘 지냈죠.

     

아버님은 배를 타셨죠?

내 젊었을 때는 전국적으로 살기 힘든 시기라, 공무원들도 한 달 월급 해봐야 몇 만원 못 받던 시기였거든. 배를 타면, 잡는 것만큼 갈라먹기 식이 되니깐 많이 잡으면 부수를 나눠 먹으니 수입이 엄청 좋았죠. 내가 탔던 배는, 조기 잡으러 다니는 배였어요. 일본 말로 나가시라고 해요. 배에서는 일본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일본말을 많이 쓰더라고요. 우라시라고 해서 돛대 세워져 있는 배는 풍선이라 바람으로 배를 끌고 가면서 고기 잡고. 방질(활개그물에 긴 새끼줄을 매달아 배에서 끌어당기는 그물)이라고 그물로 바닥을 긁고 가는, 일종의 고대구리(작은 후릿그물)지. 나는 어업을 하는 배들을 많이 탔어요. 옛날에는 기계가 큰, 큰 바다에 나가서 어업 하는 배들은 많이 없었고 주로 섬 가에서 잡는 어선들이 많았지요.

     


결혼식은 언제 하셨나요?

군대 갔다 와서 3~4년 살다가 결혼식을 했죠. 딸 둘 낳고요. 딸들은 지금 40이 다 됐어요. 38살, 40살. 두 살 차이나요. 애들은 이 집에서 태어나서 가덕도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어요. 더 옛날에는 집이 여기가 아니었고 이 산 밑에 있는 초가집이었는데, 헐고 이 집을 지었어요. 이 집 지을 때만 해도 상당히 동네에서는 크고 넓다 했는데, 지금 와서는 작죠. 애들이 덕문고등학교 다녔는데, 섬에서 교육이 옳게 되나요. 학원도 없죠. 부산에 평수 작은 아파트를 하나 사가지고 2년제 대학을 다니게 했어요. 거기서 취직하고, 거기서 둘 다 결혼을 했어요.

     

어르신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도시 공장지역으로 시골 사람들이 많이 나갔잖아요. 우리는 그 시기 앞이라, 우리 젊었을 때는 도시나 공장이나 그런 건 많이 없을 때였어요. 오히려 사람들이 일거리 찾아서, 돈을 벌러 가덕도로 많이 왔죠. 우리 애들 학교 다닐 그 시기쯤 되니까 사람들이 시골을 많이 떠난 거죠. 내가 7살에 천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민해도 학생 수가 상당히 많았어요. 한반에 40명씩 한 학년에 2반까지 있었다니까. 대항이나 천성에도 초등학교가 다 있을 정도였어요. 그 후에 눌차도 초등학교를 만들고요. 지금은 학생 수가 별로 없어서 폐교가 됐잖아요. 가덕도에 친척들도 많고 하니까 친척들한테 거의 얹혀살았죠. 그 땐 굴양식 많이 하던 시기라 이 동네 사람도 그렇고 밖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송정, 용원서. 녹산공단이나 신항이나 매립하기 전에는 촌부락 이었잖아요. 여기도 매립이 다 되기 전이거든. 여자들은 굴 까고 남자들은 임금 받으면서 일을 했는데, 머슴 식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들어왔어요. 굴 하는데 인부들이 많이 필요하니까, 보통 한 집에 굴 까는 여자들이 열명, 남자들이 2두세명. 작게 하는 집에도 여자들이 대여섯명 있었어요. 굴 캐는 철에만 들어와서 먹고 자고 하면서 일 하는 거예요. 김장철, 주로 11월, 그 때 시작하면 4~5월까지는 굴을 하죠. 자기 구역이 딱 있어요. 옛날에는 육지로 올려서 작업할 여건이 안 되니깐 배에서 풀면, 바닷가 그 자리에서 까고, 껍질을 바로 버리니깐 저절로 매립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 동네가 이리 커진 거지요. 그 때 같이 일하던 데서 우리 집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했어요. 나도 돈이 없고 집사람도 살기 힘드니깐 둘이서 벌어가지고 살자, 이런 식으로 해서 둘이서 살게 된 거죠.

     

굴 양식은 어떤 방법으로 하나요?

항월 앞바다하고 신항 만든 앞바다하고는 수심이 얕았어요. 지금은 땅을 파서 깊은데. 수심이 얕은데 살포식으로 뿌리는 거예요. 그러면 굴이 뻘에 뿌리를 박아요. 그러면 굴이 이만큼 커요. 1년 만에 이만큼 크는데 이것을 갈고리로 건져요. 예전 배는 노 젓는 작은 목선이잖아요. 그걸 타고 남자들이 갈고리로 건져서 오면 여자들이 집에서 굴을 깠어요. 지금 우리집 밑으로 예전에 다 바닷가였어요. 굴을 많이 하다 보니, 굴 껍질로 전부 매립한 거예요. 이 동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도로가 나 있잖아요. 도로 안쪽으로 전부 매립지 예요. 세월이 지나면서 굴 껍질로 매립한 위에 집을 짓고 이렇게 된 건고요. 지금 우리 동네는, 굴 껍질 매립지가 마을 본 땅보다 더 커요.

     

굴껍질로 매립을 할 수 있군요?

굴을 까면 껍질이 많이 나오잖아요. 바닷가에 버리면, 그대로 매립지가 돼버리는 거라. 굴을 줄에 달아서 키우는 것을 수하식이라고 하는데, 그걸 하기 전에 재래식으로 한 게 살포식이예요. 충무(통영)서 수하식으로 대량 생산되다보니, 가격이 안 맞았고요, 순전히 노동을 가지고 하니 여기는 사향산업이 되어버렸죠. 지금 여기는 굴 종패, 즉 굴 씨앗을 만드는 곳이에요. 굴 껍질에 구멍을 뚫어가지고 줄에 끼워 죽 연결해서 걸어 놓으면 포자가 붙어요. 그 시기가 주로 7월 달이야. 난(卵)을 쏠 때 딱 그 시기에 맞춰서 갖다 걸면, 딱 붙어요. 그럼 이걸 풀어서 간격을 두고 다시 엮는 거야, 좀 굵은 줄에. 충무(통영)는 수심이 깊으니깐 보통 9M를 만드는데, 수심에 따라 7M 만드는 곳도 있고요. 양식장에 맞게. 여기서 포자를 붙여서 거기로 가져가는 거예요. 거기서 줄에 걸어 놓으면 1년 만에 굴이 커져, 그러면 그걸 김장철부터 까기 시작하지요. 지금 여기서 굴 까서 파는 거는 여기서 키운 게 아니라, 통영에서 다 키운 걸 차로 싣고 온 거예요. 여기는 옛날부터 굴 잘 까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잘 까요. 통영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칼로 까요. 여기서는 옛날부터 전부 쪼시개(작은 갈쿠리 모양의 굴 까는 기구)로 깠어요. 여기선 그 쪼시개로 까는 사람들이, 60대 초중반 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잘 깝니다. 주로 굴 까는 사람들이 그 나이 사람들일걸요. 선창에도 있고, 눌차에도 있고.

     



앞으로 바라는 점은 무엇인가요?

정부에서 가덕도를 필요로 해서 신항처럼 큰 공사가 들어온다면 반대 안 해요. 그래도 이대로 사는 게 안 좋겠습니까. 신항 들어오면서 장항이나 율리가 이주됐잖아요. 그 사람들 뿔뿔이 흩어져서 어디 사는 지도 몰라요. 이곳이 출생이다 보니, 친구들이랑 모임을 가져보면 밖으로 이사 간 친구들이 상당히 많아요. 그 많던 친구들이 다 밖으로 이사가버리고 남은 사람이 몇 명 안 되더라고요. 죽은 사람도 있고. 몇 명 안 남았죠. 장항, 율리 친구들은 이주단지 가서 사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러니까 동네는 없어지면 안 되겠더라고요. 못 살아도 이 자리 그대로 사는 게 좋아요. 젊었을 때 돈 많이 벌어서 부자 되는 게 좋은 일인데 나이가 들어 보니까 그렇게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부자가 되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적당하게 있으면, 돈 빌릴 정도만 아니면, 편하게 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이웃이 좋고 하니까.

     









1904, 흐르는 섬 가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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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김유리

원고  김유리

영상  문창현

사진/업로드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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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에 딸린 텍스트는 저자,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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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의 모든 인터뷰는 인터뷰이와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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