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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sol Sep 27. 2022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이야기

음악, 영화, 소설 with 와인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이야기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이야기


서늘했다.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서장원'의 데뷔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 처음 들었던 감정이었다. 일상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미세한 균열이 오랫동안 인물들의 삶에 틈을 만들어왔다는 것을 작가는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견고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세계. 그 외벽 안 쪽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되는 인물들. 그들의 당황한 얼굴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어디선가 익숙히 보아왔던 모습이다.


단편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에는 총 9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작가는 90년생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중년, 혹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이들의 심리 묘사에 무척이나 탁월하다. 물리적인 나이가 반드시 깊이를 만들어주지는 않겠지만, 놀라운 지점이다. 자신이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나이대의 인물들을 이 정도의 통찰력과 날카로움을 담아서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이.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삶이 부정당할 위기에 직면한 인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는 돌이킬 것이 많지 않아 보이는 '나이 든' 사람들의 균열은 그래서 더욱 읽는 이를 서늘하게 만든다.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은 등단작 <해가 지기 전에>와 <주례>였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의사 아들을 만나러 가는 예순 여섯의 기선과, 제자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선 정년 퇴임한 교사 경목. 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지만 서로 꽤나 닮아 있다. 드라마틱한 일들이 인물을 휘몰아가거나, 사연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그들이 진정 원하던 곳으로부터 이미 멀어져 왔음을.





국내에 잘 알려진 품종은 아니지만 이탈리아 토착 품종 중 '라크리마(Lacrima)'라는 레드 와인 품종이 있다. 이탈리아어로 '눈물'을 의미하는 라크리마는 눈물방울처럼 생긴 포도알 혹은 얇은 껍질 사이로 포도즙이 눈물처럼 베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라크리마로 만들어진 와인을 글라스에 따르면 특유의 화사한 장미향이 가득 퍼진다. 풍부한 꽃 향과 과실 향, 부드러운 탄닌과 적절한 산미가 일품인 라크리마 한 잔을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건네고 싶다.

'눈물'이라는 뜻과는 다르게 극히 화사한 향을 가진 라크리마는 삶의 모순과 그들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작은 위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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