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새로운 기술을 대하는 법
IT업은 마치 패션산업처럼 보일 때가 많다. IT 정책은 특히 유행에 민감하다. 신문에 뭔가 새로운 버즈워드가 뜨는구나 싶으면 어김없다 싶을 만치 금새 관련한 정책이 나타난다. 진흥책이 등장하고, 관련한 시험과 자격증이 출현하며, 협회와 진흥기구가 만들어진다. 나는 20년된 아이폰진흥협회가 나타난대도 하나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아이폰은 2007년에 처음 나왔다.)
최근에는 단연 ‘메타버스’다. 얼마전 워싱턴포스트는 이런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메타버스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https://www.washingtonpost.com/technology/2021/12/30/metaverse-definition-facebook-horizon-worlds/
없을 뿐 아니라, 가까운 시일 안에 현실화할 가능성도 없어보인다고 이 매체는 지적한다. 지금의 ‘메타버스’는 기왕에 있던 기술들을 그럴싸하게 재포장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10월말 연례 컨퍼런스 ‘커넥트’를 통해 아예 회사 이름을 ‘메타’로 바꾸고 메타버스로의 변신을 선언한 페이스북조차 메타버스는 앞으로 5~10년안에 현실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국에선 메타버스가 이미 낡은 것이 돼가고 있다.
지난 1년간 한국의 정부기관과 지자체는 이미 50여건의 메타버스 구축 용역을 발주했고, 여기에 투입한 예산만 100억이 넘는다. https://www.chosun.com/economy/economy_general/2022/01/08/V4UNTOBP4FEY7EFPJILJMKGJEI/
중기부 산하 창업진흥원은 지난해 11월 5천만원!을 들여 제작한 메타버스 앱을 공개했는데, 지금까지 4백여명의 방문자가 찾아 왔다. 이 메타버스에서 볼 수 있는 건 3차원으로 그려놓은 건물 안 벽에 붙은 홍보 영상과 참여기업 소개자료다. 페이스북이 전사적 역량을 동원해 앞으로 5~10년안에 완성한다고 하는 메타버스도 한국의 관공서와 지자체가 붙으면 5천만원으로 충분한 것이다. 네이버가 서비스하는 제페토에는 수십 개의 서울시 산하 기관들이 들어섰지만 대부분 누적 방문객 수가 수백 명대에 그친다.
한국의 버즈워드 IT 정책이 갖는 치명적인 공통점이 있다. 그게 뭔지를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버즈워드는 마치 ‘고도’와도 같다.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은 끝도 없이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가 누구인지, 자기들이 고도에게 뭘 원하는지, 심지어 고도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메타버스 정책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굉장히 좋은 것이고, 미래를 선점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며, 남들도 다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게 뭔지는 누구도 정의하지 않는다. 아주 좋고, 근사하고, 미래적인 어떤 것이어서 자격증을 만들고, 진흥정책을 수립하며, 보도자료를 낼 수 있으면 그만이다.
메타(페이스북)가 만들고자 하는 메타버스는 말 그대로 또 하나의 세계다. 이 세계와 함께 존재하는 평행우주다. 미국의 유명 벤처 투자자 메튜 볼은 메타버스의 조건으로 다음의 일곱가지를 꼽았다. 읽어보면 ‘독립적인 또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속성 ; 일시정지나 재설정, 종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성 ; 많은 일들이 실시간으로 일어난다.
무제한 ;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경제권 ; 판매, 소유, 투자 등 경제활동이 가능하다.
초월성 ; 다양한 온라인공간을 넘나들 수 있다. 아마도 메타버스의 이점.
상호운용성 ; 플랫폼간에 교류가 가능하고 상호운용할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여권을 가지고 똑같은 신분으로, 외국에 가서 가진 돈을 그대로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어느 한 회사가, 한 플랫폼이 독점할 수 없다.
풍성한 컨텐트 ; 마찬가지
이렇게 보면 로블록스도, 제페토도, 메타도 아직은 메타버스가 아니다. 암호화폐 진영에서 크립토화폐로 메타버스를 구현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지만 글쎄, 그건 아주 일부분에 관한 이야기고. 오로지 한국의 관공서와 지자체만이 이걸 단 5천만 원 개발용역으로 간단히 만들 수 있을 뿐.
메타버스는 3D로 구현한 서비스가 아니다. AR도 아니고, VR도 아니다. 크립토 화폐가 메타버스를 만들어 주지 못한다. 황금으로 나라를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은 서비스가 아니라 총체적인 경험이고, 또 하나의 독립된 세계다. 넘나들 수 없다면 당신이 탄 그 버스는 메타버스가 아니다.
예전 글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얘기한 적이 있다. 똑같은 얘기를 다시 한다. “기존의 질서를 깨트리거나 심하게 변형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났을 때 사회는 어떻게 그 기술과 화해를 할 수 있느냐. 법적, 제도적, 사회문화적 해답은 어디에 있고, 그 해답을 찾는 사회적 논의구조는 어떻게 마련돼야 하느냐. 기존의 이해관계가 부를 불가피한 저항은 어떻게 해소해나갈 수 있느냐.” 500억을 투입해 TPS를 올리는 대신에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진짜 일이 될 것입니다. 10만TPS가 진짜 필요하면 그건 기업들이 알아서 잘 할 것입니다. 거기 돈 많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gpjz/4
“얼마 전에 10만 TPS(Transaction Per Second, 1초당 처리할 수 있는 거래 수)
의 퍼포먼스를 내는 블록체인 프로젝트에 500억 원을 투입하겠다는 정부 발표를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 정책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블록체인업계에 개발비가 모자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블록체인 기술이 아직 모자라니 얼른 개발해서 10만 TPS를 낼 수 있도록 기술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최근 몇 년간 블록체인업계에는 광풍이라고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많은 돈이 몰렸습니다. 지금도 신생기술 중에서 블록체인만큼 많은 돈이 모여 있는 곳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블록체인업계의 문제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돈이 문제라고 할까요. 그 많은 돈으로도 개발을 못했다면 그건 돈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두번째로 10만 TPS를 못내는 것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입니다. 블록체인은 애초에 완전한 분산을 위해 그런 속도를 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분산시스템은 일관성(Consistency), 가용성(Availability), 분할용인(Partition tolerance) 셋 중 오직 둘만 택할 수 있다는 'CAP Theorem'처럼 제 생각에는 블록체인도 다음의 셋 중 둘만 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안과 속도 그리고 스케일입니다. 블록체인의 본성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의 블록체인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기술도 아닙니다. 블록체인은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기존의 질서를 깨트리거나 심하게 변형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났을 때 사회는 어떻게 그 기술과 화해를 할 수 있느냐. 법적, 제도적, 사회문화적 해답은 어디에 있고, 그 해답을 찾는 사회적 논의구조는 어떻게 마련돼야 하느냐. 기존의 이해관계가 부를 불가피한 저항은 어떻게 해소해나갈 수 있느냐.” 500억을 투입해 TPS를 올리는 대신에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진짜 일이 될 것입니다. 10만TPS가 진짜 필요하면 그건 기업들이 알아서 잘 할 것입니다. 거기 돈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