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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웅 Feb 07. 2022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타락한다

2022년 대선의 의미, 민주공화국의 완성

  단기 4288년(서기 1955년) 3월 26일, 대한늬우스 제 54호는 뉴스 전체를 리승만 대통령 각하의 제 80회 탄신 소식으로 채웠다. 4288년은 우리가 ‘쌍팔년’이라 부르는 바로 그 해다. 동대문운동장에선 학생들의 매스게임과 합창이 펼쳐졌고, 서울 중심가에선 군인들이 보잘 것 없는 무기를 들고 시가행진을 했다. 

https://youtu.be/zdlM0BDjgDM 

 반만년의 문명국이었지만 동시에 2차대전후의 독립국이었던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는 몹시도 낯선 것이었다. 뽑은 사람도, 뽑힌 사람도 왕과 대통령의 차이를 잘 알지 못했다. 대통령은 생일이면 ‘더욱 정정해진 모습’으로 하객들을 맞았고, ‘백성들’은 운동장에 모여 각하의 탄신을 축하하는 것을 어색해 하지 않았다. 대통령 내외의 모습을 담은 카드 섹션은 전두환 때까지도 살아남았다.  

https://m.cnbnews.com/m/m_article.html?no=180106#cb


군주정과 시민독재에 대한 반성, 민주공화정


 민주공화정은 기실 군주정과 시민독재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제도다.

 군주정의 한계는 명백했다. 폭군이 몹쓸 짓을 해도, 어리석은 군주가 나라를 망쳐도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저 왕이 죽기만 기다릴 뿐. 영국에서 크롬웰이, 프랑스에서 로베스 피에르가 마침내 시민혁명을 일으켰을 때 사람들이 환호한 것은 그때문이다. 드디어 왕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롬웰은 그 자신 총통이 돼 독재를 펼치다 결국 자신의 아들을 총통의 자리에 앉히고서야 죽었다. 로베스 피에르는 숱한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한 끝에 폭정에 질린 동료들에 의해 그 자신 단두대에서 생을 마쳤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명백한 교훈을 갖게 된다. ‘절대권력은 반드시 타락한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며, 견제받지 않는 모든 권력은 반드시 타락한다’는 것이었다. 민주공화정은 따라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허용하지 않도록 골조를 짰다. Check & Balance, 견제와 균형이 민주공화정의 설계원리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은 삼권분립이다. 그 뿌리는 그리스 로마로 거슬러 오른다. 명문화한 것은 몽테스키외다. 그는 1748년 <법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려고 하므로, 입법권, 행정권 그리고 사법권을 서로 분리해야 한다고 썼다.


 현대의 삼권분립의 개요는 대개 이와 같다. 국회는 국정감사와 탄핵소추를 통해 정부를 견제하고, 정부는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하여 국회를 견제한다. 국회는 대법관의 임명동의 또는 추천을 통해 사법부를 견제하며 사법부는 위헌법률심판 제청권을 행사하여 국회를 견제할 수 있다. 정부는 대법관 임명권과 사면권을 사용하여 법원을 견제할 수 있으며, 법원은 명령・규칙 심사권을 통해 정부를 견제할 수 있다.  


만들다 만 민주공화정  


 문제는 우리가 삼권분립에서 그만 멈춰 서버렸다는 것이다. 민주공화정의 견제와 균형은 아래에서 위로, 좌에서 우로 씨줄과 날줄 엮듯 촘촘히 짜여져 있다. 제대로 된 지방자치제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서로를 견제하게 만들고, 판사와 검사를 선출직으로 만들어 시민들이 선출하고 쫓아낼 수 있도록 하며, 기소와 판결에도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해 결정권을 가질 수 있게 만든다. 행정부와 입법부도 선출된 권력이 비선출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장치를 갖춘다. 이런 견제와 균형의 틀이 다 제대로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민주공화정이라 부를 수 있다. 삼권분립은 말하자면 민주공화정이라는 교과서의 첫번째 챕터일 뿐이다.

 

깨진 견제와 균형  


 우리는 견제와 균형을, 다시 말해 민주공화정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느닷없이 찾아온 해방을 맞아 서둘러 세운 정부는 곧 이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통과해야 했다. 3권 분립은 시늉을 했으나 나머지를 챙기지 못했고, 디테일에 악마가 숨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견제다. 검사와 판사에 대한 견제, 그리고 비선출직으로서의 고위관료에 대한 선출권력의 통제가 통째로 공백으로 남았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의 견제와 균형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공화정은 반쯤 짓다 만 집과 같은 상태다.  


 독점하는 검사, 징계받을 수 없는 판사

   

하나씩 보자. 

검찰의 기소와 수사 독점이 대표적인 예다. 견제를 할 아무런 방안이 없다. 예를 들어 2019년도에 나온 통계다. 최근 5년 동안 검사의 범죄 혐의를 검찰이 재판에 넘긴 기소율은 0.13%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전체 1만 1천여건의 사건 가운데 단 14건만 기소됐다. 일반인들의 경우 전체 사건 중 40%정도가 재판에 넘겨지는 것과 대조된다. 판사에 대한 기소율도 0.40%다. 판검사들은 99% 이상이 아예 기소도 되지 않았다. 이들은 말하자면 신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549832_28802.html


 ‘검사는 기소를 해서 명예를 얻고, 기소를 하지 않음으로써 부를 얻는다’는 속설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검사가 기소를 하지 않았을 때 마땅한 제어수단이 없다. 검사가 사건을 불기소했을 때 고소·고발인이 직접 법원에 공소제기를 요청하는 재정신청이라는 제도가 있으나, 인용률은 몇 년째 0%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나마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재정신청제도로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ttps://www.int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3709


수사와 기소의 독점에 따른 폐해도 뚜렷하다. 검찰이 직접 수사해 재판에 넘긴 사건의 1심 무죄율이 전체 사건 1심 무죄율보다 600% 가까이 높다. 법원이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한 비율도 마찬가지다. 검찰 직접 수사 사건의 기각율이 사법경찰 수사 사건의 무려 700%가 넘는다. 6배, 7배나 차이가 난다는 것은 시민의 인권 침해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다.  

https://m.khan.co.kr/politics/assembly/article/202105262024001#c2b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고 있을까? 검찰은 스스로 ‘법률전문가로서 수사기관인 경찰 수사의 위법위헌성을 통제하고, 수사가 법리적으로 공소유지 가능하게 지휘하며, 수사결과를 수사기관의 관점이 아닌 객관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기소여부를 판단하여 무리한 기소를 방지한다’는 역할을 부여받아 탄생한 기관이라고 밝히고 있다.  

문제는 검찰이 직접 수사하고 직접 기소하는 순간, 검찰 수사의 위법위헌성을 통제하고 객관적 관점에서 기소여부를 판단할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수사단계에서 세우게 되는 가설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사람이 없으니 확증편향이 심화되는 구조에 갇히기도 쉽다. 게다가 몇달씩 수사를 했는데 그게무죄라면 고과에서 나쁜 점수를 걱정해야 한다. ‘기소를 하는 편이 낫다’는 구조라는 것이다. 


 견제장치가 없는 것은 판사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판사가 성매매를 해도 무조건 10년 임기가 보장이 된다. 현행 법관징계법은 법관에 대한 징계처분의 종류를 '정직·감봉·견책' 세 종류로 정하고 있다. 정직도 최대 1년까지만 할 수 있다. 공무원징계법이 일반공무원에 대해 '해임'과 '파면' 처분도 가능한 것으로 정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우리 헌법 106조 1항은 “법관은 탄핵 또는 금고이상의 형의 선고에 따르지 않고는 파면되지 않고, 징계처분에 의하지 않고는 정직, 감봉 기타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않는다”라고 정하고 있다. 즉 범죄나 비리를 저지른 판사도, 국회가 탄핵소추하거나 금고이상의 형을 선고 받지 않는 이상 절대 ‘파면’될 수 없다고 정한 것이다. 이 둘이 합쳐서 비위 판사의 10년 임기 보장을 완성한다.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6080606008292960


 게다가 설혹 징계를 받고 법원을 떠나도 변호사로 활동하는 데는 거의 아무런 제약도 없다. 현행 변호사법 5조는 탄핵이나 파면된 사람은 5년, 해임처분을 받은 사람은 3년, 면직처분을 받은 사람은 2년 동안 변호사로 활동할 수 없도록 정해두고 있다. 그런데 법관징계법의 법관에 대한 최고수위 징계는 ‘정직’이다. 헌법이 탄핵소추와 금고이상의 형의 선고를 ‘파면요건’으로 정하고 있지만, 국회가 부장판사나 평판사에 대해 탄핵소추를 한 예는 거의 찾아볼 수없다. 사실상 유명무실한 조항인 셈이다.  

 판결에 대해 어떤 제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한국에서는 판사가 담당 변호사 혹은 피고와 사시 동기라거나, 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 사법연수원 시절 교수와 제자 사이인 경우에도 재판을 주재하고 판결을 내리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외려 그런 변호사를 수소문해서 맡기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편이 상식에 더 가깝다. ‘전관 예우’라는 이름의 범죄 행위가 여기서 나온다. 


 미국의 경우 


 뉴욕주의 판례는 우리의 관행이 얼마나 기이한지를 보여준다. 뉴욕주 대법원의 2012년 판결이다. 대법원은 캐서린 도일이라는 판사가 자신과 친한 친구가 피고인인 사건에 대해 회피를 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해임이 적절하다고 판결했다. ‘부적절한 모습’으로 보일게 분명한데도 회피를 하지 않은 것은 판사로서 옳지 않았다는 것이다.  

https://cjc.ny.gov/Court.Decisions/Doyle.Cathryn.M.COA.Decision.2014-06-26.pdf?fbclid=IwAR1UkHPj5uj_Xpv_2_Squ2WLRV0Cr8RV_1oeKgluNpRFgi02EFw6koBsJf4


 미 연방대법원도 비슷한 판결을 내린다. 실제로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와는 무관하게, 인간의 나약함을 감안할 때 판사는 이와 같은 재판은 스스로 회피를 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수정헌법 제 14조, 정당한 판결을 받을 시민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https://www.oyez.org/cases/2008/08-22?fbclid=IwAR17pkawRMeBSVnHXNILiaMvRJBHutgv01VNKWGO9FkwUki0U_P60lEba8M

 

 미국의 견제 장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은 대부분의 주에서 주검찰총장을 선거로 뽑는다. 정당 공천도 받는다. 미국은 ‘가장 정치적인 검찰이 가장 중립적인 검찰’이라는 철학을 믿고 있다. 국민이 선출한 검찰총장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고, 4년 임기가 보장되며, 대통령이나 주지사 등 다른 권력자와 당당히 겨룰 수 있다는 것이다. 형사 사건의 95%를 담당하는 주검찰청 및 카운티검찰청의 검사장은 대부분 지역주민의 직접선출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주민에 의한 지방검사 선거제도는, 권력기관의 장에 대한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기소권 오남용을 직접 감시하는 기능을 한다. 대한변호사협회는 2016년, 우리나라도 그 도입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주민이 검사장을 직접 선출하면 정치권력에 의한 하명수사를 막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https://m.lawtimes.co.kr/Content/Article?serial=102775

 

 판사도 선출하는 경우가 많다. 크게 세가지 방식이 있다. 정당입후보 방식과 비정당입후보 그리고 인준투표가 그것이다.

 정당입후보선거방식은 정당이 공천한 후보자들 중에서 유권자들이 보통선거로 일정한 임기의 법관을 선출한다. 예를 들어 텍사스주법원은 대부분의 법관을 보통선거로 뽑는다. 비정당입후보선거방식은 투표지에 당적을 표시하지 않은 채 보통선거로 일정한 임기의 법관을 선출하는 것이다. 인준투표방식도 있다. 주지사가 법관지명위원회가 추천한 후보자중 1명을 임명해 첫번째 임기를 근무하게 다음, 그 유임여부를 유권자들이 실적을 보고 찬반 인준투표를 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판사를 계속 하려면 선거에서 인준을 받아야 한다. 

       

 판검사에 대한 견제는 이게 끝이 아니다. 기소와 판결도 일반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해 견제한다. 미국에는 두 가지 유형의 배심원제도가 있다. 형사 재판으로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대배심(grand jury)과, 유죄냐 무죄냐를 결정하는 소배심(petit jury)이 그것이다.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배심원제는 소배심이다.  무작위로 선정된 일반 시민들이 재판에 참여해 만장일치로 피고인의 유무죄를 결정한다. 판사는 배심원의 유무죄 평결을 따라야 한다. 재판장이 배심원단의 판단과 반대되는 결론을 내리려면 명백한 법적, 절차적 근거가 필요하다. 이때문에 다른 판결이 나오는 경우가 흔치 않다.  대배심은 조금 낯설게 들릴 수 있다. 범죄 용의자를 기소해 재판정에 세울 것인지를, 배심원들이 참여해 결정하는 것이다. 미국의 수정헌법 5조에는 ‘대배심에 의한 고발이나 기소가 있지 않는 한, 사형에 해당하는 중범죄에 대해 그 누구도 심리를 받지 않는다’라고 명시돼 있다. 중범죄는 반드시 대배심의 심리를 거쳐 기소하도록 헌법이 보장하고 있다.


반드시 해야 할 판결문 공개


 판결문 공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판결문 공개비율은 0.3%다. 미국, 영국과 같은 나라는 불문법이다. 명문화된 법이 있는게 아니라 과거의 판결 즉 판례를 따라 판결을 하는 나라다. 당연히 ‘미확정 실명 판결문’을 전면 공개한다. 공개 재판이 원칙이므로, 재판의 결과물인 판결문도 당연히 공개한다는 논리다. 미국은 판결 이후 24시간 내에 온라인 사이트에 미확정 판결문을 게재한다. 영국, 네덜란드는 1주일 내에 공개한다. 한국 법원이 판결문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프라이버시 보호다. 영국과 미국이 프라이버시 보호가 우리보다 몇배나 엄격하면 엄격하지, 못할 리가 있을까? 아주 오랫동안 판결문을 성공적으로 공개해온 선례가 있는 데도 굳이 미공개를 하겠다고 내놓는 이유로는 구차하다.  


 판결문을 공공데이터로 공개를 한다면 아주 멋진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건국 이래 지금까지의 모든 판결에 대해 온갖 통계를 뽑아볼 수 있다. 수십년간 한국사회의 법감정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판례들간의 모순이 얼마나 있는지, 징벌의 형평성이 깨진건 없는지도 순식간에 찾아낼 수 있다. 인공지능의 발전에도 기여를 할 수 있다. 해외에는 판결을 돕는 인공지능 솔루션이 여럿 있지만 한글로 된 건 하나도 없다. 데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 사실 판사들에게도 매우 좋은 일이다. 판결간의 모순을 없애고, 양형의 형평성을 높일 수 있어 사법부의 신뢰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예비 법조인들이 공부를 하는데도 아주 좋다. 분야별로 최고의 판결들을 뽑아서 공부를 할 수 있고, 비슷한 판결을 할 때 참고로 삼기에도 아주 좋다. 판결을 내리기가 한결 수월해지는 것이다.

  판결을 모두 공개하면 ‘전관 비리’에 관한 통계도 함께 드러난다. 판사와 변호사가 사시 기수가 같거나, 근무처가 같거나, 동창/동향인 경우의 판결의 결과가 다른 사건과 견주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성의하게 작성했던 판결들도 다 공개가 된다. 


구조적 아마추어리즘을 낳는 관료 충원시스템 

 

 한국 관료의 주된 충원 시스템은 고시다. 고시는 과거시험과 몹시 닮아 있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과목은 이와 같다. 소과, 생원과는 사서오경에 대한 지식을 테스트하고, 진사과는 시나 부로 문예창작 능력을 테스트한다. 대과는 유교경전 실력, 문예창작 능력, 대책 같은 논술 능력을 시험한다. 

현재의 공무원시험 과목은 이렇다. 영어, 한국사, 헌법과 공직적격성 평가(PSAT, 언어논리, 자료해석, 상황판단). 국가공무원 5급 공채, 외교관후보자 선발, 지역인재 7급 수습직원 선발, 국가공무원 7급 공채, 입법고시(국회공무원 5급 채용시험), 국가공무원 민간경력자 일괄채용시험을 모두 이걸로 본다.


 두 제도의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 어느 경우든 제너럴리스트, 다방면에 폭넓은 지식을 갖춘 사람을 구한다. 전문가가 아니다. 두 번째, 소년 등과를 한 사람외의 민간인의 접근을 사실상 차단한다. 공무원 시험을 친 관료들의 독점시스템이다. 특채가 없는 것은 아니나 몹시 제한돼 있고, 뽑힌 사람의 재량도 한정적이다. 여기서도 역시 비선출권력을 견제할 방안이 부재하다. 견제와 균형의 또 한 축이 비어 있는 것이다. 

 전문성의 문제도 있다. 현대사회는 사회 전 부문이 크게 발전해 부문마다 굉장한 깊이가 생겨 있다. 전문지식이 없이 일을 하기는 갈수록 곤란하다. 몇백년동안 농사를 짓던 과거시험때와는 사정이 전혀 달라진 것이다. 공무원들이 미래전략이라며 야심차게 내놓는 정책들이 어설플 때가 많은 것은 그때문이다. 


‘신문에 난 새로운 키워드 따라하기’가 대표적이다. 가령 3D 프린터. 한때 새로운 산업혁명을 불러올 총아로 주목받다 성과를 낳지 못해 전세계적으로 기세가 완연히 꺾였던 2018년에도 유독 한국의 3D프린터 시장은 성장세를 유지했다. 대한민국 정부와 공공기관의 3D 프린팅 관련 장비 구입 및 관련 사업 지출이 무려 80% 가량 증가했기 때문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큰  3D프린터 구매자가 대한민국 정부라는 우스개가 생겼을 정도다. 전시행정, 곳곳의 ‘혁신센터’를 채울 전시물로 아주 근사했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에는 ‘메타버스’가 있다. 페이스북은 아예 회사 이름을 ‘메타’로 바꾸고 전사적 역량을 투입해 메타버스에 올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목표는 앞으로 5~10년안에 메타버스를 구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메타버스를 실제로 구현하는 데는 남은 과제들이 많다. 놀랍게도 한국 정부와 지자체는 이미 메타버스를 만들고 있다. 지난 1년간 한국의 정부기관과 지자체는 50여건의 메타버스 구축 용역을 발주했다. 여기에 투입한 예산만 100억이 넘는다. 나눠보면 한곳당 2억이 안되는 돈으로 메타버스들을 척척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메타버스 사업자들의 양대 비즈니스모델중 하나가 정부 메타버스 구축 SI사업 용역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https://brunch.co.kr/@brunchgpjz/33

 

 미국에는 18F, 영국에는 디지털서비스청, GDS(Government Digital Service)가 있다. 국가의 디지털사업 도입을 수행하는 조직이다. 모두 IT기술 전문가로 구성돼 있다. 각분야의 민간 엔지니어들이다. 수백명의 뛰어난 개발자들이 전문성을 갖고 일한다. 백악관의 IT비서는 탁월한 해커다. 전문가의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일이 대단히 자연스럽다. 소년급제를 유일한 인재채용경로로 둔 시대착오는 고쳐져야 한다. 영국정부의 ‘전자정부 디자인 10원칙’은 지금 봐도 정말 근사하다. 이런 조직에서는 메타버스가 판을 치지 못한다.  

https://www.gov.uk/guidance/government-design-principles 


일 못하는 장관, 관료의 실효지배 


 아마추어화하는건 관료들만이 아니다 선출되지 않은 행정관료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을 오히려 좌지우지하는 현상은 민주주의 국가의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문제다.

현재 한국에서 장관이 취임할 때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은 고작 두 명의 비서관뿐이다. 장관이 설혹 혁신을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해도 현재의 구조에서는 뜻을 펼치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부처는 산하에 KDI와 같은 정부출연연구소를 두고 있다. 장관의 뜻이 전문관료의 그것과 다를 때, 산하 연구소에서 수십 명의 박사들이 달라붙어 만든 정책보고서는 신임 장관을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장관은 대개 그 부처의 전문가가 아닌 경우가 많다. 설혹 전문가라고 해도 사안마다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사한 수준의 객관적 보고서를 대안으로 제시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관료들이 스케줄을 짜주는대로 외부 행사를 열심히 다니거나, ‘다시 여의도로 돌아갈건데 굳이 이렇게까지 싸워야 할 필요가 있겠냐’ 하며관료 집단과 타협할 수밖에 없게 된다.  

프랑스는 각 부처마다 20~40명 규모의 장관실(합계 720명)을 설치해 직업공무원과 정치적으로 임용된 공무원이 함께 장관을 보좌한다. 장관이 시민 전문가들을 데리고 들어가 공약을 실행한다. 시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비선출 권력을 견제하고 통제할 장치다. 독일은 정치적 임용관료를 따로 두고 있다.  


청와대 조직이 백악관보다도 더 크다?  


 ‘청와대 인력이 미국 백악관 인력보다도 더 많다, 나라 크기를 비교하면 인원이 두 배 이상 많다’는 기사들이 자주 나온다. 비대하다는 것이다. ‘내각 중심으로 국정운영을 안정화시켜야 하는데, 조직을 키워 행정부 권한을 침해한다’고도 비판한다.  

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18052825181


 사실일까? 
 백악관에는 비서실외에도 ‘대통령 집행부(EOP Executive Office of President)’라는 거대한 정책 집행부서가 존재한다. 1,800명이 넘는다. 집권당의‘어공’들이 대거 들어가 있는 EOP는 각 부처의 인사권과 예산권을 갖고, 이를 기반으로 확실한 부처 장악력을 발휘하며 대통령의 핵심 공약을 추진한다. 시민들에 의한 선출권력이 비선출권력인 관료에 대한 통제를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을 하는 것이다. 고한석 전 디지털재단 이사장의 다음 글은 이런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다. 정독할 가치가 있다.  

https://firenzedt.com/16971?fbclid=IwAR2YCFb_Yu4nib_IbWgaSaAdw1r0Lip-N2PNOqFY62xADoSV4izu_0DmqRI

 

 군사독재 시절 만들어진 기형적인 국무총리제도 시민에 의한 지배를 방해한다. 헌법 제86조 2항을 보면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고 명시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아니라 국무총리가 행정 각부를 총괄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비서실’인청와대는 공식적으로는 대통령을 보좌할 뿐 행정 부처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은 수렴청정을 하는 일종의 ‘상왕 정치’를 하게 되고 실제정부 운영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국무총리가 공식적, 일상적으로 지휘한다. 청와대는 대체 뭘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구조다.  


무능한 국회의원?  


 정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정당은 가령 180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실상을 보면 180명의 자영업자들이 모인 것과 같다. 개개의 국회의원이 몇명의 보좌관들을 데리고 의정활동을 하지만 이들 보좌관들은 지역구 관리와 홍보, 각종 행사까지를 커버해야 한다.

실제로 전문성을 가지고 국회의원들을 지원해줄만한 전문가그룹은 원내 정책전문위원이다. 이들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더불어민주당에 할당된 숫자는 44명이다. 부처별로 대략 2.5명의 전문위원이 있는 셈이다. 보건복지위에는 2명이 할당돼 있다. 보건 영역과 복지 영역은 매우 다른 분야다. 결국 한 명이 한 분야를 맡는 셈이다. 이 숫자로는 입법부가 행정부를 상시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정책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2022년 정부 한해 예산이 6백조가 넘는다. 이것을 감시해야할 국회의원이 활용할 수 있는 전문가가 부처별로 달랑 두 명이라는 얘기다. 의정활동의 아마추어화가 구조화 돼있는 셈이다.  

의석수당 2명씩의 원내 정책전문위원을 갖도록 확대 개편을 하면 각 부처를 대상으로 10~20명의 전문위원들이 상시적으로 모니터링과 정책연구 활동을할 수 있다. 정당의 정책 전문성도 양적 질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정책전문가 풀(pool)에 정권교체 등으로 퇴직한 고위공무원들이 합류하면현장성도 보탤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한층 유능해진 국회의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국회의원, 더 많은 전문위원들이 필요하다.  


반쪽의 지방자치 


 1950년대 정권수립의 초기 우리는 일본과 서구를 본떠 지방자치제를 도입했다. 앞서 쓴 것처럼 지방자치제의 취지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의 견제와 균형이다. 군사정부에게 견제는 탐탁지 않은 것이었다. 5.16을 통해 집권한 군사정부는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고 “지방의회를 조국 통일시까지 구성하지 아니한다”라고 못을 박아버렸다.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방자치법은 88년에야 부활했고, 91년 지방의회 선거, 95년 단체장 선거를 치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지방자치는 여전히 반쪽짜리다. GDP 대비 지방정부의 지출과 수입비중은 점점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재정자립도 역시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재정자립도가 40% 초반인 상황에서 중앙정부가 내려주는 교부금에 목을 걸어야 하는 지방정부가 견제와 균형을 제대로 해내기는 어렵다. 수도권집중은 이런 불균형으로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한다. 2022년의 대한민국은 헌법 제1조를 완성할 책무를 받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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