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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멀미 Nov 27. 2015

당신도 모르는 사이 당신에게 다녀간 사랑

당신도 모르는 사이 당신에게 다녀간 사랑이 있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그걸 알게 되었다면 그때 당신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지난 주에 뜻밖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J였습니다. 잘 지내냐는 말과 근황을 서로 전하고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그녀가 심호흡처럼 물었습니다. 혹시 아직도 그 나침판을 가지고 있느냐고요. 나침판? 제가 되물었습니다. 그리고는 곧 어떤 기억 하나가 마음 속에 떠올랐습니다.

10년 전쯤의 일입니다. 짐을 좀 옮기려 하는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녀가 살던 집 근처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대학에서 식물의 습성 등을 연구 하던 그녀의 짐은 의외로 단촐했습니다. 대부분의 짐은 이미 박스에 담겨 있었습니다. 


새로운 집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골목이었습니다. 창문을 열면 모과나무가 노랗게 서 있고 그 뒤로 몇평 쯤 햇살이 과일보다 더 노랗게 익고 있었습니다. 그 밝고 작은 방으로 무거운 책들을 옮겨주고,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힐 때 쯤 그녀가 내게 나침판을 건넸습니다. 이거 제가 산에서 표본 채취할 때 방향을 잃지 않게 해준건데요. 이제 저 대신 오빠가 가지고 있으면 좋을 듯 해요.  

그것이 사랑의 고백이었다고, 수화기 너머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눈치도 못채고 그 나침판을 그냥 어딘가에 넣어둔 채 긴 세월이 조용히 흘러가버렸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게 다녀간 사랑입니다. 통화를 끝내고 자리에 앉으니 잊혀졌던 그 날의 풍경이 눈 앞에 다시 펼쳐집니다.

짐을 옮기면서도, 불편하게 그녀가 입고 있던 흰 블라우스와 작은 웃음 뒤 붉게 스미던 두 뺨이 선명한 문양으로 내 마음에서 인화됩니다. 이제 가볼게. 벌써요? 어둡기 전에 가야지. 네. 먼길 와줘서 고마워요. 나 여기서 한동안 혼자 지낼 거 같아요. 그런 말들도 회신처럼 내게 들려옵니다.

서랍에서 나침판을 찾아 꺼내 봤습니다. 흔들리다가 어느 지점을 가리키며 멈춰섭니다. 그녀와 내가 잠시 함께 있던 그 시절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평범한 일상으로 여겼던 그 순간들은, 지금 바라보면 사랑입니다. 그녀의 전화 한 통이 그 시절의 풍경을 다시 사랑으로 내게 되돌려 준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도 내가 모르는 내 사랑의 날들은 아닐까. 오늘 하루가 먼 훗날 생의 가장 빛나는 한 지점으로 전환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녀가 전화를 하기 전까지 그 날은 내게 오늘처럼 일상의 하루였을 뿐입니다.


그때 비록 우리는 사랑으로 발아하지 못하고 서로 멀리 여기까지 왔지만 그 날은 좌표처럼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나만 모르고 있던 내 사랑의 한 순간입니다. 오래 숨겨져 있다가 이제서야 내게 발견된 사랑입니다.

돌아갈 수는 없지만 기억할 수는 있는 그 곳. 만질 수는 없지만 그리워할 수 있는 그 곳. 내가 아무리 흔들어도, 생이 이렇게 나를 흔들어도 그녀의 나침판이 변함 없이 가리켜주는 그 지점. 흰블라우스를 입고 그녀가 나를 보며 미소 짓던 그 오랜 작은 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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