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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멀미 Oct 25. 2021

그리움 또는 길의 힘

당신은 여행자입니다

목적지에 닿는 것 자체보다 그저 어디론가 떠난다는 사실이 더 설렌다면 당신은 여행자입니다. 앉거나 누웠던 순간보다 오히려 힘들게 걸었던 시간들을 더 오래 떠올린다면 당신은 여행자입니다. 더 많이 모으려는 안간힘과 더 높이 쌓으려는 욕심은 적고, 그저 어딘가로 묵묵히 계속 걸어가는 일, 그것이 더 중요하다 믿는다면 당신은 생의 여행자입니다. 아무리 오래 일상에 머물렀다 해도, 단순함으로 계속 반복된다 해도 결코 고인 채 썩지 않는 당신. 실패했어도 늘 꿈꾸는 당신. 높은 곳보다 먼 곳을 그리워하는 당신. 그렇게 당신을 당신이게 하는 것. 그것이 여행이고, 그것이 그리움이며, 그것이 길의 힘입니다. 



버스가 듈리켈에 닿았을 때 내린 승객은 나와 프랑스 여행자 둘 뿐이었습니다. 나모붓다를 찾아가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코끝으로 주근깨가 가득한 여자가 배낭을 어깨에 올리며 내게 말합니다. 나모붓다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습니다. 아니오. 나는 그저 길 따라온 것뿐입니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나모붓다를 안 간다고요? 그 뒤로 나는 한참 동안 나모붓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 그곳으로 가는 길에 어떤 풍경들이 있는지 그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당신이 진정한 여행자라면 꼭 그곳에 가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흙을 가득 싣고 구부러진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의 소음 때문이었는지, 지난 며칠 동안의 긴 여정 때문이었는지 나는 조금 심드렁했습니다. 저 아래쪽으로 가면 괜찮은 숙소가 있다는 말과 자신은 내일 아침에 출발할 계획인데 시간이 맞으면 함께 가자는 제안을 모두 가볍게 거절하고, 도망치듯 반대편 언덕 쪽으로 향했습니다. 마을을 잠시 둘러본 뒤 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모붓다는 이미 머리에서 잊혀진 뒤였습니다. 



듈리켈은 작고 아름다운 마을로 기억됩니다. 언덕 위로 붉게 페인트 칠한 학교가 있고, 작은 버스 정류장 근처 여행객을 위한 식당이 두 곳, 무너진 탑 아래 풀 뜯으며 묶여 있는 염소들, 어디론가 느리게 걷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골목의 담이 어깨보다 낮았고, 그곳에서 고개 들면 멀리 설산이 우체통 크기로 보였습니다. 저 산이 정말 우체통이라면 그 안에 몇 통의 편지가 들어있을까. 저 산이 잘 보이는 곳에 숙소를 얻어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창문으로 경치가 좋은 도로 쪽 방은 500루피. 창문도 없는 안 쪽 방은 650루피를 부릅니다. 아니, 설산이 풍경처럼 훤히 보이는 방이 더 싸다고요? 다시 한번 확인해도 같은 가격이었습니다.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행자에 대한 배려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무거웠던 짐을 풀고, 며칠 동안의 여행을 기록하고, 내려가서 밥 먹고 돌아와 다시 그 방에 누웠을 때에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소음이었습니다. 낮에 봤던 트럭 행렬이, 밤이 되자 굉음을 내며 도로를 달렸고, 그 소리들이, 소리 지르듯 방으로 밀려들어왔습니다. 웅웅웅 하는 엔진 소음과 브레이크를 밟는 금속의 소리들과 함께 뒤척이다가, 화장지를 뜯어내 귀를 좀 막아보다가, 잠깐 잠들었다가 괴로운 아침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안쪽에 위치한 방은 낮의 경치를 잃는 대신 밤의 안락함 때문에 높은 가격이었습니다. 어차피 밤에는 설산이 안 보이는데 나는 왜 이 방을 선택했던 것일까요. 그렇게 늦은 후회를 하다가 그 프랑스 여행자가 저 아래에 괜찮은 숙소가 있다고 말했던 것도 기억해냈습니다. 어제 그 사람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잠이 달고, 꿈은 부드럽고, 이 아침에 몸은 개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나모붓다에도 가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진정한 여행자라면 나모붓다에 가야 한다는 말도 다시 생각났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밤의 긴 소음 때문에 나모붓다에 가게 된 셈입니다. 아니, 나모붓다에 가야 했기 때문에 그 버스를 탔고, 그 여행자를 만났으며, 밤의 소음이 나를 괴롭혔던 것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모붓다를 향해 걸으면서 내가 보고 만난 길의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한 겨울인데도 노랗게 핀 유채꽃들. 으깬 흙으로 벽을 세워 올리던 푸른 모자의 노인들. 잠깐 기다리라고 붙잡은 뒤 투박한 귤 몇 개를 건네주던 소년들. 고마운 마음에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한참 망설이다가 ‘예쓰’라고 답하던 그 아이들. 들판이 끝도 없이 먼데, 분명 산은 그 보다 더 멀리 있는데, 그 산이 손에 잡힐 것처럼 눈앞에 보였던 기적의 착시들. 그렇게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듈리켈과 나모붓다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 길을 걸었던 것은 큰 행운입니다. 모든 여행자가 나모붓다에 간다는 말은, 나모붓다에 가는 사람은 모두 여행자가 된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어쩌면 그날부터 나는 길을 사랑하는 사람. 길을 더 그리워하는 사람. 길의 힘에 이끌려가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여행자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나모붓다에 닿았을 때 큰 실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작고 쇠락한 절에 비둘기들과 고양이 몇 마리가 졸고 있을 뿐, 거대하거나, 화려하거나, 누구나 찾아가야만 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곳, 이렇게 허름한 곳을 봐야 한다고 그 여행자는 내게 그렇게 오래 설명했던 것일까요. 


 괜찮습니다. 여행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고, 나모붓다는 다만 나모붓다 한 지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모붓다는, 그곳이 어디든 나모붓다로 출발하는 그 지점에서부터 나모붓다에 닿기까지의 모든 길을 다 포함하여, 나모붓다입니다. 당신은, 나와 당신 사이의 길까지 모두 포함하여 당신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는 것. 마찬가지로 지금은 나모붓다와 멀지만, 언제나 나는 희미하게 나모붓다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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