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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 Sep 07. 2020

저는 답답할 때 지난 일기장을 펴봐요

딱 1년 전의 나에게서 다시 배우는 중

2019년 9월 12일

도쿄 도착. 오랜만에 '혼자 하는 여행'이 주는 설렘에 잔뜩 들떠있는 나. 나리타 공항에 가뿐하게 도착 후 Keisei 천 엔 버스를 타고 도쿄역까지 온 뒤 긴자에 위치한 호스텔까지 약 20분 거리를 걸어왔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인 것 치고 이상하게 몸이 크게 피곤하지 않다. 호스텔 체크인 시간이 3시였는데 내가 도착했던 시간이 3시가 되기 10분 전쯤이었으니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리셉션에서 나를 맞아준 직원은 내 여권을 보더니 자기가 미국-한국 혼혈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한국어를 가르쳐준 적이 없어서 한국말은 거의 못한 댔다. 그런데 어째서 일본에 살며 일본어는 현지인 수준으로 하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뭐. 도쿄에는 필립을 만나러 온 거지만 굳이 필립의 도착 날보다 하루 먼저 와서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은 혼자 여행하던 시절 내가 느꼈던 자립감, 자유로움, 독립심 혹은 외로움 그리고 그 모든 감정 사이사이를 채우는 나만의 생각들과 감각들을 짧게나마 되돌려보고 싶어서였다. 숙소도 굳이 혼자 사용할 거면 호텔보다 호스텔도 괜찮을 것 같더라. 그리고 기왕 호스텔에 묵기로 마음을 정했으면 믹스 도미토리로! 예전에 호스텔닷컴에서 최저가로 정렬해서 맨 위에 뜨던 숙소로 직행하던 때처럼. 지금은 리뷰, 위치, 가격, 시설, 청결, 서비스까지 다 고민하고 숙소 결정을 하다 보니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역시 괜히 아는 것만 많아져서는 인생이 조금 더 고달파(?) 진다. 단순할 땐 뭐든 쉽다. 이번엔 크게 생각, 고민 안 하고 가격 저렴하고 적당히 좋은 리뷰의 호스텔로 큰 비교 없이 바로 결정을 했다. 내 침대 번호는 4022번. 도미토리지만 최고급 도미토리랄까 각 침대가 캡슐 형태라 마음에 들었다.


일단 체크인을 하고 배가 고파서 구글맵으로 식당부터 찾다가  걸어서 9분 거리에 있는 미소카츠 가게로 정했다. 미소카츠는 나고야 지방의 명물로, 도쿄에 몇 개 없는 미소카츠 전문점의 지점 중 한 개가 바로 내가 찾은 긴자점이라고 했다. 그냥 근처에 있는 식당 중 브레이크 타임 없이 열려있는 식당을 찾아간 건데, 얻어걸려 발견한 곳 치고 나름의 스토리와 특별함이 있는 곳 같아 뿌듯했다. 구름 꼈지만 파란 하늘, 입고 있는 재킷이 약간 덥게 느껴질 정도의 늦여름 기온까지 걷기에 딱 좋았다. 미소카츠는 내 입맛에 짜고 느끼했다. 경험상 먹은 것으로는 OK. 배가 심하게 불러서 네 조각을 남겼다. 무척이나 친절한 가게였다. 그리고 걸어서 Fanyu의 일러스트 책에서 봐두었던 Itoya에 갔다. 책에서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서 본 커다란 문구점이 마음에 들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쩜 마침 딱 긴자에 있는지? 굉장한 행운과 좋은 기운이 나를 따라다니고 있는 기분이다.


Itoya는 일본의 미친 큐레이팅과 기획력을 다시금 증명하는 곳이었다. 무슨 긴자 한복판에 12층짜리 건물이 통째로 라이프스타일 백화점인지. 11층은 Indoor Hydroponics 층으로 실내에서 상추 같은 식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우주에서 지구의 환경을 재현해낸 뒤 같은 조건으로 배양하는 느낌이어서 신기했다. 영화 마션 같기도 하고. '잠깐 둘러봐야지'하고 갔던 곳인데 두 시간은 족히 보낸 것 같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포장 스타일리스트(Wrapping stylist)라는 직업과 그 스타일리스트가 제공하는 포장 서비스였다. 어떤 물건이든, 심지어 마스킹 테이프 몇 개 정도 산 게 다인 나에게도 포장할 거냐고 물어보았다. Stylist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포장의 수준과 그 스타일, 정성이 모두 굉장히 도 수준급이었다. 그동안 신경 크게 쓰지 않고 툭툭 전하기만 했던 과거 내 선물들이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이런 마음과 선물을 나도 주고 싶다! 혹시나 받게 된다면 얼마나 감동적일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받기보다 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다행이었다. 많은 영감을 받았다. 내가 구매한 것은 마스킹 테이프 세 개 (화이트, 블루, 토스트 일러스트)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 장식품 두 개, 일정 표기용으로 쓸 가는 테이프. 거기에 내가 고른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가 나의 카트에 딸려 들어가서 얼떨결에 구매하게 된 종이 새까지.


일본은 진짜 아날로그 유저 익스피리언스의 정점에 있는 곳이다. 작은 디테일에서 느껴지는 유저를 향한 배려와 진지한 고민이 늘 나를 감탄하게 한다. 오늘 구매한 KITTA의 가는 테이프(혹은 스티키 노트)는 디자인도 예뻤지만 진짜 다이어리를 꾸며본 사람이 만든 티가 나서 반해버렸다. 다이어리 속 작은 날짜 칸에 여행 등의 일정을 한 번에 표시하고 싶을 때 일반 마스킹 테이프는 늘 두꺼운 감이 있었는데, 유저의 이러한 문제를 캐치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거다. 접어서 다이어리 사이에 낄 수 있게 만든 디테일까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다음 목적지는 다이칸야마 티사이트 츠타야이다. 앉아서 일기도 쓰고 책도 읽으려고 애초에 무겁게 가방을 챙겨 왔다. 책도 일부러 츠타야 창업자가 쓴 책을 가져왔다. 긴자역에서 Hibiya 라인을 타고 Ebisu역에 내린 뒤 걸어갔다. 제일 가까운 역 보다는 조금 걸어야 하는 역으로 골라다녔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둡고 조용했던 다이칸야마의 밤거리. 여행자로서 혼자 이국의 밤거리를 걸은 게 얼마만인지. 밤공기가 전해주는 신선함에 나는 너무나 행복해졌다.




2019년 9월 13일

어제에 이어 쓰는 일기. 펜을 다 써서 새로 세븐일레븐에서 구입한 FRIXION BALL slim 0.38짜리로 쓰고 있는데 이 펜은 아무래도 전에 쓰던 Juice ball 0.3보다 훨씬 못하다. 어제 다이칸야마 티사이트에서 읽을 책으로 이 곳의 창업자이자 설계자인 마쓰다의 <취향을 설계하는 곳, 츠탸야>를 가져온 건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다. 2층 Music코너 스타벅스 창가 자리에 그린티 라테 하나 시켜놓고 앉아 Itoya에서 사 온 마스킹 테이프도 열어보고, 책도 읽고, 일기도 썼다. 책에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문장을 발견하면 밑줄을 긋거나 바인딩용 포스트잇을 붙여나갔다. 읽던 책을 닫았을 때 삐죽삐죽 들쭉날쭉 삐져나와있는 포스트잇을 보고있자니 상당한 뿌듯함이 밀려왔다. 조금 더 내 자신과 갖는 농밀한 시간을 자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까지 했다.


도쿄에서 하루였지만 온전히 혼자로서 지낸 이 시간은 생각보다 더 완전했다. 혼자 잘 해내는 모습에서 자신감을 얻고, 피부로 마음으로 느끼고 표현해내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충만함으로 채웠다. 지난 3년 나는 나의 컴포트 존(comfort zone)이라는 버블 안에서 참으로도 안전히 지내왔다. 런던에서는 필립의 존재가 그 버블을 단단히 터지지 않도록 지켜주었다. 회사에서 주는 월급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았던 편안했던 나날들. 집에선 엄마와 아빠의 보호와 챙김으로 이어졌던 쉬운 아침과 저녁, 여행지에서 역시 둘이라는 안정감에 새로운 누군가와 말을 나누어본다거나 하지 않았다. 출장이라도 가는 날엔 공항에서 호텔까지 택시로 이동, 벨보이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호텔로 들어갔다. 편하기는 한데 왜 자꾸 부족한 느낌이 들까. 왜 이렇게 낯설지. 너무 편안해서 이렇게 쭉 '살아질까 봐' 오히려 불안해졌던 아이러닉 한 상황의 연출. 그러던 중 도쿄에서의 하루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래 이게 부족했던 거야. 스스로와 농밀하고 깊은 시간을 가져보는 것, 혼자 다 해내 보는 것. 지금보다 나이는 더 어렸음에도 더 자신감이 있었던 이유는 다 내가 혼자 해내 봤던 기억과 경험이었고 그래서 더 단단했었다. 버블 안에서 물렁해져 갔던 내가 필요했던 건 바로 '도쿄에서 혼자 지낸 하루'같은 것이었나 보다. 겨우 하루의 시간으로 이렇게나 충만해지다니, 내 마음이 분명 많이 물러지긴 했나 보다.


하루의 일정을 끝내고 다시 돌아온 호스텔. 믹스 도미토리 특유의 소음이 예전의 헤지고 낡은 그때의 케케묵은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샤워를 하러 지하 1층으로 목욕, 세안 도구를 모두 챙겨 내려가는 그 모든 불편함이 어쩐지 싫지 않다. 호스텔이라는 단어가 주는 젊음과 자유의 기운이 온몸을 감싼 기분이 들었다. 새벽부터 길을 떠나느라 6시부터 짐을 싸는 사람의 소음, 한 두 명 일어나기 시작해 여기저기에서 기척을 내고 누군가 맞춰놓고 듣지 못한 채 공허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알람 소리에 억지로 잠에서 깨는 일이 이상하리만치 싫지 않은 거다. 내가 가장 단단했던, 그리웠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겠지. 이번 주말이 지나고 다음 주가 되어 다시 평범한 버블 속 일상을 시작하게 되더라도 결코 이전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경험과 기억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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