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 여행자들이 리스본으로 가야 하는 이유
리스본행 야간 비행기를 타고 리스본에 온 지 5일째 되는 날이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밤 11시 55분 비행기였음) 겨우 5일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 만큼 이곳에서의 시간은 주우욱 길게 늘어나 있는 것만 같다. 시간에 대한 감각이 단단히 뒤틀려있다. 마치 나는 이곳에 늘 있어왔던 사람같이 느껴지고, 오 일이 아닌 다섯 달을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나는 벌써 이 낯선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이 도시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채로 도착했다는 걸 생각하면 단순한 이미지의 복기 때문도 아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탔던 택시의 창 밖으로 바라본 풍경에 나는 곧바로 동화되어 버렸다. 20시간을 보낸 비행기에서의 시간이 거짓말처럼 머릿속에서 삭제되고, 낯선 곳에 뚝 떨어진 느낌이 아닌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만 여겨졌다. 서로 잘 맞는 인연이 있는 것처럼 도시와 개인 간에도 합이라는 게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게 진짜로 존재하는 거라면, 나와 리스본은 합이 잘 맞는 한 쌍임을 직감했다.
사람들이 리스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는 이곳이 굉장히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도시라는 사실이다. 리스본은 오래된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시 속을 세상에서 가장 모던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이 채우고 있어 굉장히 신선한 바이브를 풍기고 있었다. 리스본에는 관광객을 넘어 젊은 엑스팻이 넘쳐난다. 디지털 노마드의 인기 목적지이기도 해서 무심코 들어간 카페라도 노트북 하나 열어두고 일하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이 한 명쯤은 있다. 정착해서 장기간 지내는 외국인들도 치이게 많다. (리스본에 머무는 짧은 기간 동안 나는 벌써 리스본으로 이주한 영국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그리고 진지하게 올해 내 이민을 계획 중인 미국인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크고 중요한 도시라서 외국인이 많은 런던이나 뉴욕 같은 도시 말고, 허브 역할을 하는 국제도시로써 설계된 탓에 엑스팻이 넘쳐나는 홍콩, 싱가포르 혹은 두바이같은 곳이랑 비교해보면 리스본이 얼마나 신선한지 감이 오는데, 걔네들은 사이즈가 작아도 지리적으로 엑스팻의 비율이 높은 것에 타당한 이유가 있다. 게다가 글로벌 기업들의 APAC 헤드쿼터가 몰려있고 양질의 일자리가 많아 고연봉의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니 커리어 하이를 노리는 외국인들이 많은 것이 자연스레 이해가 된다. 다만 이런 곳들의 물가는 높고 여유 넘치는 라이프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탓에 디지털 노마드들이 열광하는 곳은 아니다.
리스본도 마찬가지로 정착해서 사는 외국인이 많은 데다가 디지털 노마드 천국이기까지 하니 엑스팻의 비율이 꽤 높은 편인데, 애초에 엑스팻 유입을 위해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라서 홍콩이나 싱가포르, 두바이처럼 최첨단 21세기형 미래 도시 같은 곳도 아니고 오히려 여전히 도시 자체는 낡고 오래된 매력이 흘러넘친다. 주변 국가 대비 작은 사이즈에 커리어 하이를 노릴만한 곳도 아님에도 이곳에 젊은 프로페셔널 외국인이 많은 이유는 그들이 여기에서만 누릴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을 좇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포인트이다.
포르투갈은 EU 국가니까 타 EU 국가 사람들은 당연히 손쉽게 이민을 와서 살 수 있고 그 외에도 정부가 이민자에게 내는 비자에 까다롭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 연중 온화하고 아름다운 날씨와 주변 국가 대비 저렴한 물가, 웬만한 거리는 골목골목 걸어서 쏘다닐 수 있는 아담한 규모 (=출퇴근길 지옥철 없다는 말), 2-30분만 택시 잡아타고 나가면 서퍼 천국 해변이 나오는 라이프스타일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니 이미 이 정도만으로도 "(나 포함)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다. 여기에 덧붙여 디지털 노마드, 엑스팻을 위한 커뮤니티가 놀라울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다는 점이 리스본을 한층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있다는 게 무슨 말냐면 첫 번째로는 도시 곳곳에서 원활한 영어 커뮤니케이션을 기대해도 좋다는 의미이다. 관광업이 발달한 도시니까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영어 소통은 당연하겠지만, 리스본의 영어 수준은 상당히 인상 깊었는데, 이 정도면 일상생활에도 전혀 문제가 없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유럽 국가 중 영어 소통 지표를 나타내는 순위권에 포르투갈이 없는 것이 의아하다 싶더니만 어쩌면 이게 디지털 노마드 & 엑스팻의 유입이 느는 추세에 발맞춰진 아주 최신의 현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힙한 브런치 카페, 커피 로스터즈, 체인 레스토랑이 늘어가고 그곳에는 반드시 영어 메뉴판과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종업원이 있는 것처럼.
두 번째로는 혼자와도 충분히, 아주 아주 쉽게 같은 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걸 의미한다. 이건 디지털 노마드 혹은 이민자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닌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내가 리스본과 사랑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던 아주 결정적이고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곳엔 당신을 환영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리스본에 도착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확실한 기질 같은 것이 있다고 믿는다. 여유로운 삶을 우선시하고, 바다와 바람을 사랑하는 사람. 풍부한 햇살과 그 햇살 아래에서 자란 재료로 만든 신선한 음식의 귀함을 아는 사람, 맛 좋은 와인 한 잔 너머 나누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 친절함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 이 중 적어도 한 개의 박스에는 체크 표시가 채워지는 사람이 리스본에 온다고,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그런 사람들끼리 만날 수 있도록 차려진 장이 존재한다면, 만나자마자 다음 만남을 기약하게 되는 친구를 만나기란 그다지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리스본의 다양한 코리빙/코워킹 스페이스, 온라인 엑스팻 커뮤니티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단순 여행자들은 관광 투어에서 엑스팻을 한 명쯤은 만나게 되고 손쉽게 그 범위가 확장된다.
디지털 노마드와 엑스팻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한 필수 키워드 비건이라든가 오가닉.. 아사이볼 같은 단어들이 유독 눈에 띄어 그것 또한 이 기묘하고 독특한 도시의 바이브에 한몫을 더한다. 발리 한 스푼 더해졌나 여기? 이곳은 분명히 한 나라의 수도라기보다는 오히려 휴양지에 더 가까운 분위기를 가졌다. 하필이면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날씨를 자랑하는 5월이라서, 관광객도 확실히 넘쳐난다. 그 어떤 도시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복합적이고도 환상적으로 새로운, 기분 좋은 신선함을 느끼고 있다. 바이브런트, 칠링, 히스토리컬, 컬츄럴, 인터내셔널이라는 키워드가 죄다 느껴진다. 어느 도시에든 가져다 붙이기 쉬운 수식어들이지만, 리스본에서는 이 단어들이 조금 더 분명하고 온전하고 진정으로, 또 전체적으로 느껴진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감상이겠지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모습이다.
이곳에서 나는 조금 더 편안하다. 공원에서 혼자 벤치에 앉아 (높은 확률로 외국인일)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젊은 사람들을 본다. 분명히 서울에서는 흔치 않은 풍경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즐거움이다. 변화에 발맞춰 모던하게 변해가는 아름다운 오래된 도시.
리스본은 로컬의 어센틱함보다는 다이벌스에 확실히 집중된 느낌이고,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다이벌스가 아니라 리모트 워커, 엑스팻에게 최적화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당신이 홀로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이 정답이다. 이곳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넘쳐난다. 단순히 예쁜 풍경만을 기대하기에는 의외의 재미있는 면이 많은 도시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장점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다. 이 장점이 로컬 포루투게스, 리스보너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치고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우선 외국인의 높은 유입은 필연적으로 집값의 상승을 불러일으킨다. 리스본 시내 곳곳의 많은 집들은 이미 외국인을 위한 에어비앤비 숙소로 탈바꿈되어 있고, 아마 그곳에는 로컬들이 더 이상 살지 못하고 그들은 점점 더 외곽으로 빠져나가고 있을 확률이 높다. 리스본에서 진정한 포르투갈스러움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것 역시 불가피한 결과치일 것이다. 포스트 코비드 이후 리모트 워크의 비중이 높아지고 리스본에 유입되는 엑스팻이 더 더 늘어가면서 기존의 디지털 노마드들이 느끼던 리스본의 매력은 점점 더 사라질 확률도 낮지 않다. 이전과 대비하여 렌트 가격이 말도 안 되게 올랐다고 한다. 리스본의 커다란 플러스 요인 중 하나였던 부담스럽지 않은 물가의 이점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지점이다.
이번 여행 중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리스본에서 나고 자란 토종 포르투게스를 만나보지 못한 점이다. 포르투갈 그리고 리스본의 변화를 누구보다 몸소 느끼고 있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언제 돌아오더라도 환영받고 싶은 욕심을 부려본다. 주기적으로 이곳에 찾아오게 될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