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이야기의 시작
아무런 무늬도, 글자도 없는 하얀색 키카드를 감싼 종이 홀더에는 421이라는 숫자가 쓰여있다. 421호. 앞으로 여섯 밤을 묵게 될 호텔 방 번호였다. 카드를 건네는 그녀는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절로 눈길이 갈 만큼 풍만한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갈색 곱슬머리를 하고 하얀색 셔츠에 검은색 재킷과 에이라인 스커트를 입고 있는 리셉셔니스트. "제가 여기서 6박을 하는데요." 나는 6이라는 숫자를 은근히 강조하며 입을 열었다. "네." 가슴이 큰 그 호텔리어는 한쪽 입술로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눈빛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라는 듯 미묘하게 짓궂은 느낌으로 변해있다. “리노베이션 된 방이라던가, 좀 큰 침대가 있는 방으로 배정해줄 수 있나요? 기왕이면 좀 더 깔끔하고..." 나는 이미 의도를 간파당했음을 인정하며 돌려 말하지 않기로 한다. "이 방도 깔끔해요." 그녀는 그저 으쓱할 뿐이었다. 그녀가 건네는 싸구려 종이 홀더에 적힌 방 번호는 결국 변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는 언제부터죠?" "7시 반부터 10시 반까지 저기 뒤에 보이는 홀로 오면 돼요." 그녀는 모든 질문에 필요 이상의 사무적인 어투로 대답하여 나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나 참 이런 건 물어보기 전에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속으로 불평한다. 대단히 불친절하다곤 할 수 없지만 결코 환영받는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 칙칙한 분위기. 썰렁하리만치 의례적인 체크인을 마치고 좁고 어두운 엘리베이터를 타고 숫자 4 버튼을 꾹 누르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 딱 돈을 낸 만큼의 서비스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별 세 개짜리 고객응대.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별 다섯 개짜리를 바란다면 돈을 더 내고 길 건너의 포시즌스 호텔로 가면 된다. 하지만 이미 비행기 표에 예상외의 지출을 해버려서 아쉽게도 누워 잘 수 있는 곳에 대한 선택지가 많지 않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건 포시즌스에서 여섯 밤을 자는 옵션은 없었을 거라는 건 웃긴 팩트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두운 엘리베이터가 나를 4층에 내려놓았다. 나는 복도에 깔린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짙은 카키색 카펫 위를 힘주어 걸었다. 마치 어디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씩씩함을 잃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는 듯이. 곧 421호 문 앞에 도착했다. 벽지의 디자인과 문의 색깔, 문고리의 형태는 이 호텔이 얼마나 오래된 호텔인지 짐작케 한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선 방은 그럭저럭, 1점 별점 테러가 무색하리만치, 끔찍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 가격에 이 정도면 아주 나쁜 건 아니었다. 물론 대단히 촌스러운 인테리어와 본래 기능 외에 그 어떤 고찰이나 의도도 느껴지지 않는 기본 중의 기본 가구들, 창 밖으로 보이는 건 공사 중인 수영장뿐인 따분한 뷰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많은 값싼 호텔 방이었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정리된 널찍한 더블베드와 넉넉하게 크기 별로 구비된 하얀 수건들(물론 끝은 낡아 헤져있었지만), 신경 써서 청소한 티가 나는 화장실과 샤워 공간(리뷰대로 작은 곰팡이가 눈에 띄었지만)에 나는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던 것이다. 뜬금없이 대형 원형 거울이 벽에 붙어 있어서 매일 이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옷을 골라 입었다. 나는 이 방에 빠르게 적응하였고, 첫날밤부터 깊은 잠을 잤다.
어른의 용기는 돈에서 나온다. 그 믿음이 나를 리스본으로 이끌었다. 나의 믿는 구석은 통장잔고였다. 한 푼이 아쉬운 신세라 낡은 호텔에 묵는 주제에 갑자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겠지만, 나는 돈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내가 스스로 정한 예산 안에서 움직이기 위한 선택을 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내 통장에는 포시즌스에서 6박을 할 수 있는 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거기'에 '그 돈'을 사용할 수는 없을 뿐이었다.
떠나오기 불과 4일 전까지만 해도 나는 거의 이 여행을 포기하려고 했었다. 작은 사건도 어떤 계시처럼 받아들여버리는 운명론자의 가혹한 운명이랄까. 비행기의 일정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그 과정이 너무 가혹했다. 전화기를 들고 전화기 너머의 사람과 자꾸 언쟁을 벌여야 했다. 나는 그 상황을 피하고만 싶었고, 어쩌면 차라리 포기해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건 우주의 경고였다. 시작부터 이렇게나 삐걱거리다니 이건 앞으로 다가올 더 커다란 재앙의 전조임이 분명했다. 멈춰야만 했다. 나에게는 더 이상 전화기 너머의 가상 인물처럼 느껴지는 익명의 누군가와 싸워낼 에너지가 없었다. 주변에서는 날더러 더 독하게 진상을 부려야 한다고 했다. 내가 소비자라서 전화기에 대고 진상을 부려도 되는 입장이라는 게 싫었다. 나를 이용해 먹고 기만하는 판매자의 고약한 행태도 끔찍했다. 그래, 이건 우주가 너에게 보내는 신호야. 도망쳐!
4일 뒤, 결국 비행기에 몸을 싣게 만든 건 내가 진상을 부리는 것에 성공해서도 아니고, 진상을 듣고 있어야 했을 상대가 나의 요구를 들어주어서도 아니었다. 참으로 단순하고 시시하게도, 지금 떠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였다. 후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시간이 지난 뒤에 밀려오는 후회가 있는가 하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후회도 있다. 전자가 시간이 주는 배움과 깨달음 혹은 성숙함에 기인하는 후회라면 후자는 체화된 본능에 가깝다. 연인과의 이별 후 그때 내가 그런 말은 하면 안 됐었는데- 하고 후회할 때가 있는가 하면 연인과의 다툼에서 순간적인 말실수를 저지르고는 곧바로 그 말을 내뱉은걸 후회하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시간 차에 따라 후회의 성격이 조금 달라진다. 최악의 경우, 그 두 개의 후회를 동시에 겪을 수도 있다. 매 순간을 후회하고, 그 순간이 쌓여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자꾸 뒤돌아보게 만드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괴롭지만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이번에 리스본행을 포기하게 된다면 두 가지 후회가 혼종 하는 아주 완벽한 예시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예약 취소 버튼을 누르자마자 후회할 거고, 잠들기 직전부터 잠에서 깬 직후까지 습관처럼 후회했을 테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아 그때 리스본엘 갔었어야 하는데...'하고 후회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스스로에게 가하는 지독한 형벌이었다.
대신 나에게는 확실한 안전빵이 필요했다. 나는 지금 우주의 경고를 무시하고 예견된 대재앙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으니까.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리스본에서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진다 싶을 때 틀림없이 나를 구원해줄 수 있을만한 무기가 필요했다. 결국은 돈이었다. 아니다 싶으면 당장 다음날 비행기를 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고, 예산에 맞추려고 낡은 호텔에 묵다가 예상치 못하게 우울해지기라도 하면 기꺼이 나를 다시 웃게 만들 곳으로 잠자리를 옮기면 된다고 자신할 수 있을 정도의 잔고는 꽤나 믿음직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나에게는 전에 없던 용기가 생겼다. 우주의 경고 따위 돈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지. 우습게도 돈이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깨닫자 스스로가 굉장히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누군가 ‘돈은 필수인가요?’라고 물어본다면, 필수는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생존을 위한 최소 금액 이상의 여윳돈이 있으면 사람은 자유로워진다. 리스본으로 떠날 선택의 자유는 용기에서 시작되었다. 용기를 내야만 하는 일에는 어떤 식으로든 리스크가 따라오지만 돈은 그 리스크를 실제보다 작아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준다.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한다고 가정했을 때, 충분한 여유자금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사업이 망할 경우의 리스크를 가늠하는 마음 가짐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실 ‘돈은 필수인가요?’라는 질문을 낡은 호텔에 묵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더 나은 호텔로 옮길 수 있는 옵션을 가진 나에게 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다. ‘인생에서 학벌이 중요한가요?’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는 대답은 학벌이라고 내세울 만한 게 없는 사람의 입에서 나와야 진실인 거니까. ‘우리의 인권은 잘 지켜지고 있나요?’ ‘우리는 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나요?’ ‘돈은 중요한가요?’라는 질문의 대답은 그 질문의 스펙트럼에서 가장 약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답만이 진실일 뿐이다.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착실히 저금해온 돈에 한 번쯤은 기대도 좋을 것 같아서, 나는 그렇게 리스본행 비행기에서 편한 마음으로 <프렌즈>를 보며 낄낄거리기로 했다. 유형의 무기를 용기삼아 도착한 리스본의 낡은 호텔에서, 제대로 된 미소 한 번 안 보여주는 리셉셔니스트에게 굴하지 않고 이 말도 안 되는 인테리어도 보다 보니 나쁘지 않다고 여기게 되며 오히려 이 호텔에 남겨진 최악의 리뷰들이 너무 가혹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나는 괜찮았다. 아니, 나는 기뻤다. 나는 행복했다. 벌써 익숙해진 421호 호텔 방 침대에 누워 생각한다.
"도대체 여길 어떻게 안 올 생각을 했던 거지?"
다음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