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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 Jul 27. 2023

Only Ones Who Know

by Arctic Monkeys

  '어디서든' 꽃을 피우려면 사람은 주변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낼 만큼 뛰어나거나, 속한 환경에 맞춰 살 만큼 겸손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라면 뜻이 맞는 최소한의 사람들이 곁에 있어야 한다. - 비비언 고닉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중

  

  토요일 오후, 나는 홀로 리스본 캄포 그란데 버스 터미널의 24번 플랫폼에 서있다. 배낭을 멘 등에 땀줄기가 몇 가닥씩이나 흘러내리는 날씨다. 나는 버스를 기다리는 기다란 줄의 일부가 되어 뙤약볕 아래에서 의미 없는 부채질을 하고 있다. 내 앞에 선 중년의 포르투갈 남자는 햇빛을 정면으로 맞선 바람에 눈을 제대로 못 떠서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여있다. 역시나 포르투갈 출신으로 보이는 젊은 커플 중 여자 쪽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짝다리를 짚고 턱을 과장되게 움직이며 껌을 씹고 있다. 몇 명은 줄에 서있기를 포기하고 그늘에 앉아있다. 나는 버스가 도착했을 때 그들이 제발 나를 앞질러 새치기만은 하지 않았으면 하고 조용히 속으로 바란다. 앞과 옆의 사람들을 티 나지 않게 관찰하고, 천천히 망상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일. 나는 지금부터 드디어 완벽하게 혼자이다.


-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나는 수다스러운 여자 친구들과의 점심식사를 막 마친 후였다. 엘리와 소피아. 소피아가 메뉴판을 보기도 전에 뭘 먹을지 이미 알고 있는 타입이라면, 엘리는 메뉴 하나를 고르는 데에도 웨이터에게 "제가 지금 컨티넨탈 브런치와 아사이볼 중에 고민하고 있는데 뭘 고르면 좋을까요?"라고 물어보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며칠 전 저녁식사 자리에서 디저트를 고를 때조차 웨이터를 붙잡고 "초콜릿 무스와 네그로니 조합이 좋을까요, 아니면 코코넛 케이크에 레드와인이 나을까요?"라고 물으며 '고민의 늪에 빠진 저를 좀 도와주세요!'라는 표정을 짓더니, 웨이터의 "저는 개인적으로 초콜릿을 좋아해요."라는 별 시답잖은 대답을 듣자마자 뭘 그렇게 고민했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초콜릿 무스와 네그로니를 시켰었다. 테이블에 앉은 한 명 한 명의 의견을 다 묻고 나서도 결정을 망설이더니만, 단지 웨이터가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자리에는 초콜릿 무스와 네그로니가 놓였다. 당연하게도 내가 추천했던 메뉴는 코코넛 케이크에 레드와인이었다. 나에게는 “너 초콜릿 무스는 어제도 먹었잖아. “라는 타당한 근거도 있었는데.

  "얼마나 배가 고픈지에 따라 다르죠. 배가 많이 고프다면 컨티넨탈이 나을 거예요. 아사이볼은 양이 적거든요." 웨이터는 친절했다. 그리고 식당 직원으로서 메뉴 추천을 묻는 고객에게 객관적으로 해줄 만한 말이기도 했다.

  "그럼 컨티넨탈로 할게요. 옆자리에서 시킨걸 보니 양이 상당해 보이기는 하네요.”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나와 소피아를 쳐다보며 덧붙인다.

  “너희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다."


-

 

  일주일 전에는 북런던의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콘서트에서 생전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술과 친구만 있다면 남자들의 용기는 배가 된다. 핑계 삼기 좋기 때문이다. 남자는 취기가 도는 기분을 핑계 삼고 짓궂은 친구의 장난을 핑계 삼아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뚫고 눈에 들어오는 여자에게 말을 건다. 그쪽은 남자 넷, 이쪽은 여자 둘. 회색 티셔츠를 입은 곱슬머리 남자가 유독 나에게 관심을 표한다. 그쪽이 술과 친구를 핑계 삼는다면, 그래 나는 여행과 음악을 핑계 삼기로 했다. 다른 차원 속으로 이끄는 음악과 그것을 라이브로 듣는 이 비현실 같은 현실 속에서 나는 그 어떤 것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와 나는 가까이 붙어서 마치 평생을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밀한 척을 하고,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다가 서로의 잔에 담긴 술을 바꾸어 마시기도 한다.

  "이 스타디움에는 평소에 축구 보러도 자주 오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 처음 봐." 곱슬머리 남자가 내 옆에 바짝 붙어 귀에 대고 큰소리로 뜬금없는 말을 한다. 은근히 본인에 대한 정보를 가득 담고 있는 문장이다.

  "그럼 너 아스널 팬이야?" 나는 그가 원하는 질문을 해준다.

  "맞아."

  "여기 북런던 출신인 거야?" 나는 다시 묻는다. 어느샌가 그의 눈동자가 너무 가깝게 다가와있다.

  "그것도 맞아. 지금도 여기 근처에 살아. 넌?" 이번엔 그가 가볍게 묻는다.

  "난 한국에서 왔지." 나는 올게 왔구나 싶은 심정으로 답했다.

  "아니 그니까, 네가 한국에서 온건 알겠는데, 지금 어디에 사냐고." 그는 내가 당연히 런던에 사는 줄 안다.

  "나 한국에 살아. 믿기 어렵겠지만 런던에는 오늘 아침에 도착했어. 나 이 콘서트 보러 한국에서 여기까지 온 거야." 나는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고요히 희열 한다. 상대방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들었다는 데에서 오는 일종의 승리감과 말로 내뱉어진 현실에 대한 도취감, 거기에 지금 우리 둘의 스쳐 지나가는 관계에서조차도 우위에 섰다는 착각이 뒤섞인 희열이다.

   그는 혼란에 빠져 말한다.

  "뭐야, 악틱몽키즈가 그렇게 대단한 밴드였어?"  


-


  이튿날 런던에서 리스본으로 넘어온 뒤 리스본에서는 꼬박 다섯 밤을 내리 엘리와 함께 보냈다. 우리는 침실 두 개짜리 집을 빌려 지내며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는 약속이나 한 듯 반드시 매일 함께 했고 틈틈이 작은 기회라도 주어질 때면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내가 말이 통한다고 느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대화의 주제는 때때로 종잡을 수 없이 멀고 깊게 뻗어나갔다. "요즘 인생이 너무 납작해." 나는 종종 그녀에게 불평하곤 했다. 그러는 사이 서로에게 각자의 불완전함은 그 투명도가 점점 높아졌고 그럴수록 우리는 서로의 존재에 안도했다. 엘리가 일을 하는 낮 시간 동안은 주로 혼자 도시 곳곳을 걸어 다니면서 이것저것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곤 했는데, 저녁식사 테이블 앞에서 엘리에게 그 모든 걸 압축하여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일이 오일 연속으로 이어졌다. 하루는 가방에 카메라와 책 한 권(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을 챙겨 넣고 에두아르도 7세 공원에 가서 오후를 통째로 잔디밭에 앉아 보냈다. 이 아름답고 광활한 공원은 도시의 상징적인 장소이지만 왜인지 수상할 정도로 조용하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했다가도 돌아가는 길에는 마음이 어찌해 볼 도리 없이 복잡해져 있기 일쑤였다. 이곳엔 생각이라는 것을 할 여지가 너무나도 많았다. 귓속에서는 Arctic Monkeys 신보의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차례대로 멜랑콜릭 하게 흘러나오는 와중에 손에 들린 책의 한 구절을 도저히 넘기지 못하고 멈춰서 같은 구간을 반복해서 읽다가, 돌연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기억할 수 있는 시점 이후로 평생, 나는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상태라는 게 들통날까 봐 두려웠다. 원하는 일을 하면 기대에 못 미칠 게 분명했고, 알고 지내고 싶은 사람들을 따라가 봤자 거절당할 게 뻔했으며, 암만 매력적으로 보이게 꾸며봤자 그저 평범해 보일 것이었다. 계속 움츠러들던 영혼은 그렇게 손상된 자아를 둘러싼 모습으로 굳어져버렸다. 나는 일에 몰두했지만 마지못해 그럴 뿐이었고,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은 있어도 두 걸음 옮긴 적은 없었으며, 화장은 했지만 옷은 되는대로 입었다. 그 모든 일 중 무엇 하나라도 잘 해낸다는 건 별생각 없이 삶과 관계 맺는 일, 다시 말해 내 두려움을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삶을 사랑하는 일이었을 텐데,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확실히 할 줄 아는 건 몽상으로 세월 흘려보내기였다. 그저 '상황'이 달라져서 나도 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고만 있는 것.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나는 그 순간 내 안의 깊게 자리 잡은 구멍의 존재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 당장 엘리가 필요했다. 음악을 끄고, 급한 볼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서둘러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공원을 빠져나와 다시 상 벤투 거리의 서쪽을 향해 집으로 돌아간다. 지도도 필요하지 않다. 요란하게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엘리를 재촉한다.

  "일 언제 끝나?"  

  

-


  원하는 모습이었건 그렇지 않았건 사람이 주는 기묘한 에너지에 둘러싸여 일주일을 보내고 난 뒤, 지금 더운 공기를 뚫고 24번 플랫폼에 2740번 버스가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이 버스는 약 한 시간 뒤에 에리세이라 터미널에 도착한다. 내가 혼자가 될 준비가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에리세이라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는 순전히 나만이 정할 수 있으니, 이루어지지 않은 인연과 기억을 남겨두고 홀로 버스에 오른다.



Only Ones Who Know

Arctic Monkeys


In a foreign place, the saving grace was the feeling
That it was her heart that he was stealin'


Oh, he was ready to impress
And the fierce excitement, the eyes are bright
He couldn't wait to get away
And I bet that Juliet was just the icing on the cake
Make no mistake, no


And even if somehow we could have
Shown you the place you wanted
Well, I'm sure you could have made it
That bit better on your own


And I bet she told a million people that she'd stay in touch
But all the little promises, they don't mean much

When there's memories to be made
And I hope you're holdin' hands by New Year's Eve

They made it far too easy to believe
That true romance can't be achieved these days


And even if somehow they could have
Shown you the place you wanted

Well, I'm sure you could have made it
That bit better on your own
You are the only ones who know



다음 이야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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