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되어 만난 친구들
리스본이 눈에 보이는 세계와 관계를 맺는 법은 다른 어떤 도시와도 다르다. 이곳은 게임을 한다. 이곳의 광장과 거리는 흰 돌과 색돌로 무늬를 넣었기 때문에 길이라기보다는 천장 같아 보인다. 벽은 안팎을 막론하고 전부 그 유명한 아줄레조스 타일로 덮여있다. 그리고 이 타일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멋진 건들에 대한 얘기를 담고 있다. 피리 부는 원숭이, 포도 따는 아낙, 기도하는 성자, 바다의 고래들, 배를 타고 가는 십자군,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당, 하늘을 나는 까치, 포옹하는 연인들, 길들여진 사자, 표범 무늬 곰치. 이 도시의 타일은 가시적인 세계, 볼 수 있는 것들로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 존 버거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중
"어디에서 왔어? Where are you from?"라는 질문에 뉴요커와 런더너는 응당 본인이 뉴욕과 런던 출신임을 첫 대답에 밝히고야 만다. 그들은 "미국/영국에서 왔어."가 아니라 "뉴욕에서 왔어." "난 런던 출신이야."라고 말한다. 마치 짠 듯이 똑같이 내뱉는 그 대답은 뉴욕이, 혹은 런던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또는 어떤 곳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 태평함, 소속감과 자부심의 표출이자 내재화된 습관의 발현이다. 그들의 말마따나 뉴욕이나 런던은 한 국가에 속한 도시 정도로만 취급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무언가 이고, 그 자체가 지도에서 뚝 떨어져 나온 것처럼 느껴지는 또 다른 세계이다. 터전이라는 말보다는 무대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그런 곳.
알렉스는 정말 뉴욕스러운 사람이었다. 얼굴 선까지 기른 짙은 검정 머리를 귀 뒤로 넘겨 묶은 그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묻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뉴욕!"이라고 외친다. 그 한마디가 이미 그에 대한 많은 것을 설명한다. 단지 그가 뉴욕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나는 그가 지독한 상처로 끝난 사랑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며, 음악과 예술 혹은 문화에 취한 숱한 밤들을 보냈을 거라는 것, 외로움의 늪에 빠져 괴로워해 봤을 것이라는 걸 단숨에 짐작할 수 있다. 뉴욕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은 그가 인생에 중요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려준다. 무언가에 취한 듯 반쯤 풀려있는 눈빛과 뉴욕이라는 그의 배경이 어렵지 않게 한 편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뉴욕은 세계 최고의 도시야. New york is the best city in the world..." 그가 중얼거렸다.
반면 맥스는 "나는 원래 잉글랜드 출신인데 지금은 여기에 이민 와서 살고 있어."라고 대답한다. 아, 이 친구는 런던 사람이 아니구나. 나는 빠르게 눈치를 챈다. 뻔하다. 런던 출신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잉글랜드 어디?"라고 두 번째 질문을 던지자 그는 그제야 버밍엄이라고 말한다. 구태여 버밍엄이 잉글랜드 북부에 있는 도시라고 덧붙여가면서. 때론 태어난 출신지 보다도 현재 본진을 두고 있는 장소가 한 사람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브렉시트가 터지기 직전 도망치듯 영국을 빠져나와 포르투갈로 이민 온 맥스를, 나는 버밍엄이 아닌 리스본으로 기억할 테니까.
가끔은 시간이란 게 얼마나 간사한지 생각할 때가 있다. 나 역시 지난해에 30년을 가까이 살았던 집과 동네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추억과 기억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질 정도로, 나는 새 집과 새 삶에 빠르게 적응을 하고, 애정을 쏟고 편안함에 길들여졌다. 30년이라는 시간을 감쪽같이 지워버리기에 1년은 충분한 시간이었다. 도대체 그 오랜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어째서 내 안에 그대로 살아있지 않는 걸까?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오래된 것들은 힘을 잃는 걸까? 어쩌면 간사한 건 시간이 아니라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기억에 오래 남겨두고 싶은 것들은 조금 더 의식적으로 대해야만 할 것이다. 몇 년동안이나 매일 같이 지나다니던 길가 위 이름 모를 가게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텅 빈 공간이 되어있을 때, 나는 그곳이 텅 비어버리기 전엔 어떤 모습이었는지 끝끝내 기억해내지 못한다. 이전엔 비어있지 않았는데 이제는 비어버렸다는 그 사실만을 문득 알아차릴 뿐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애정을 쏟은 곳이 아니라면 그 곳은 나에겐 그저 익명의 가게일 뿐이다. 그 무심하고 차가운 불공평은 늘 시간의 길이를 이겨버리고 만다.
너도 버밍엄이 기억에서 지워졌니?
줄곧 리스본에서 살았던 것 같지는 않아?
버밍엄에서 나고 자란 시간은 기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몸에 새겨져 있는 거지. 내 말투에 새어 나오는 이 버밍엄 억양처럼. 나에게 고향이란 게 그래. '살던 곳'이라는 과거형이 아니라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라는 미래의 가능성이야. 내가 떠날 수 있었던 건 돌아갈 곳이 있어서였다고 말하면 너무 역설적인가?
아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엘리가 데려온 알렉스와 맥스를 처음 마주했을 때 우리는 모두 온몸에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채였다. 머리카락에서는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고, 가장 높은 하늘에 걸린 태양이 내뿜는 햇살에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우리는 일부러 멀리까지 걸어가서, 은색 쟁반에 잔뜩 쌓여 나오는 대구와 정어리 구이를 함께 먹어치웠다. 맥주가 미지근해지지 않도록, 작은 사이즈의 병을 시간 차를 두고 여러 개 주문하며 천천히 마셨다. 땡볕 아래 살갗이 타는 것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그늘 하나 없는 해변가 모래사장에 앉아, 얼굴이 벌게지는 것이 햇살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모를 만큼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셨다.
나는 리스본이 정말 마음에 들어. 기대했던 것 이상이야. 솔직히 처음 이틀은 지루했는데, 이렇게 바닷가에 나와보니까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 지루하다고 생각할 땐 모든 게 다 지루하더니, 좋다고 생각하니까 이제는 보이는 게 다 좋아. 이렇게 너희도 만났잖아. 정말 여기로 이사 오고 싶을 정도인데. 뉴욕에서 잠깐 만났던 그 사람에게 말을 해볼까...
과거형이야? 옛 연인?
나도 모르겠어. 이게 과거형인 건지.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아. 그 사람이 포르투갈 출신이라서, 그래서 리스본에 와보고 싶었던 것도 있어.
그러면, 뉴욕에 돌아가서 네 사랑을 고백하고 함께하면 안 되는 거야? 같이 리스본으로 돌아오면 되잖아.
너 내가 몇 살로 보여? (글쎄, 30대 중반 정도?) 나는 사실 이제 40대가 다 되었어. 근데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어려. 그래서 함께하자고 말을 할 수가 없어. 여전히 창창하고 젊은 나이에 나를 만나면... 나 때문에 그의 젊음과 청춘을 다 허비해버리는 게 아닐까? 내가 감히 사랑한다고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있잖아, 나는 너와 정 반대의 상황에 있어본 적이 있거든? 나보다 열다섯 살이 많은 남자를 사랑했었어. 우리는 꽤 오랜 시간 연인이었고. 그 사람의 마흔 번째 생일날 스물다섯 살이던 나를 앞에 두고 그가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어. 왜 자기와 함께하는 거냐고. 또래 남자를 만날 수도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자기냐고.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네 말을 들어보니 그 사람이 무슨 마음이었는지 알 것 같아. 나이 차이가 있는 관계에서, 나이가 많은 쪽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 그런데 말이야, 그 생각 약간 오만한 거 알아? 그래, 내가 나이는 어리지.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애니? 내 시간 허비해가면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굳이 왜 만나겠어? 나이는 어릴지언정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것 정도는 알고 사리분별은 하는 성인이거든. 그 사람이 너를 만났던 건 그 어떤 희생이나 낭비도 아니었을 거야. 그 사람은 너를 사랑해서 만났던 거야. 나이 차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해가며 사랑을 할 때에 더 큰 용기를 내는 건 건 오히려 어린 쪽이야.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겠니? 그러니까 어떤 이유로 그 사람과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너희가 함께였을 때의 그 사람 마음까지 의심하지는 마.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왜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야. 나 참.
나이를 먹는 것은 가장 명확하게, 그래서 가장 잔인하게 시간의 흐름을 체감시킨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도 예외 없이 망각의 노예이다. 내 나이가 실감 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거지? 우리는 끊임없이 물을 것이다. 오늘의 낯섦에 압도되어서 과거를 잊는다. 새로운 사랑 앞에서 시간(=나이)은 텅 비어버린 익명의 가게만큼이나 힘이 없고, 그래서 지나간 사랑은 새로운 사랑 앞에선 단지 유령일 뿐이다.
리스본에 도착하기 단 일주일 전에 나는 만 서른 번째 생일을 맞았기 때문에 나이를 묻는 질문과 동시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뒤늦은 생일 축하를 마구 받았는데, 어쩐지 서른 살이라는 나의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다. 서른 살이 되어도 스무 살 때 만났던 친구들 앞에서는 내 나이를 잊는다. 우리는 영원히 스무 살에 머물러있다. 아직도 스무 살 같은데 도대체 십 년이라는 세월이 어디로 가버린 거지? 우리는 계속해서 묻는다. 그런데 서른이 되어 처음 만난 친구들 앞에서는 망각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지금부터 나에겐 지워질 기억이 아니라 순간에 주의를 기울일 기회만이 주어진다. 언젠가는 이 순간도 과거가 된다. 나는 또 나이를 먹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내 나이를 믿지 않으려 들 것이다. 그 시간의 끝에서, 내 눈앞에 익명의 가게들만 펼쳐져 있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관심과 애정으로 물건을 채워나가고 이름을 만들어갔던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기를 바란다.
호텔로 돌아온 늦은 새벽 시간, 아무리 털어내도 계속해서 해변가의 모래가 온몸에서 떨어져 나온다. 마치 놓아도 놓아도 놓아지지 않을 끈질긴 기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