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서 책이란
어릴 때 아버지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주셨고, 엄마는 책을 아빠 몰래 사주셨다. 아버지에게 책은 빌리는 것이었고, 엄마에게 책은 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아빠가 빌려온 책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엄마가 사준 책은 다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책은 사는 것이냐, 빌리는 것이냐 묻는다면 딱 잘라 말하겠다. 사서 보라고. 그래야 내 것이 된다고. 그 옛날, 없는 살림에도 엄마는 책을 끝없이 사주셨는데, 계몽사, 금성출판사 같은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이 집에 전집으로 배달돼 오는 날이면 그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사준 전집은 세계고전명작 시리즈였는데, 분노의 포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죄와 벌, 대지 같은 책을 읽으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내가 지금 책을 쓰고 글 쓰는 업무를 할 수 있는 이유도 그저 어린 시절 좋은 책을 많이 읽었던 덕분이다. 아마 그 시절의 독서가 부족했다면 책 쓰기는 둘째고, 이렇게 다양한 행사의 원고를 써야 하는, 스피치라이터 업무를 절대 소화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훌륭한 책만 읽은 건 아니다. 한편으로는 만화와 무협지도 많이 읽었다. 김용의 무협지는 한국에 들어온 건 다 읽었다. 결혼하고 이사 아홉 번 다니는 동안에도 빼먹지 않고 가장 먼저 챙기던 책이 ‘영웅문’이다. 신일숙이 그린 ‘아르미안의 네딸들’, ‘리니지’같은 만화는 지금도 여전히 좋아서 얼마 전에는 소장용을 샀다. 김진의 ‘바람의 나라’도 좋았고, ‘불의 검’, ‘비천무’ 같은 만화도 좋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면서 동시에 ‘비천무’의 슬픔도 함께 느꼈다는 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그랬다. ‘데미안’을 읽으면서 동시에 ‘불의 검’을 읽고 있었으니까.
고전은 간을 심심하게 한 음식 같아서 맛은 없다. 그런데 꾸준히 먹으면 분명히 든든하고 피부와 얼굴에도 윤기가 돈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나는 ‘죄와 벌’을 읽을 때 푹 빠져 있긴 했어도 그다지 즐겁진 않았다. 일단 두께도 두껍고 문장도 난해하다. 그런가 하면 만화나 무협지는 패스트푸드 같아서 먹을 땐 맛있고 시원하고 짜릿하다. 그런데 많이 먹으면 분명 몸을 상하게 한다. 쉽게 읽히기 때문에 이런 글만 읽다보면 정작 길고 난해한 문장을 앞에 뒀을 때 해석하기가 귀찮아진다. 다독이냐 정독이냐 묻는다면 나는 단언컨대 정독, 그것도 좋은 책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라고 말해줄 것이다.
올 한 해 읽은 책은 100권쯤 되려나. 여러 번 읽은 책보다 한 번 읽고 꽂아둔 책이 많다. 그다지 양질의 독서는 아닌 셈이다. 최근에는 토지를 읽고 있다. 역시 박경리, 더디게 읽히지만 문장이며 단어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유시민 작가가 글 잘 쓰고 싶은 사람을 위해 꼽을 만하다. 대단한 책이다.
웹툰만 보는 성연이가 이런 책을 좀 읽으면 좋겠다. 나는 아무래도 엄마보다 못한 엄마인 모양이다. 엄마는 내게 만화책이 아닌 좋은 책을 수없이 읽게 해주었는데, 나는 성연이에게 좋은 책 읽히기에 실패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