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나윤 May 02. 2020

버드와이저 740, 잠시만 안녕

모든 강의 일정과 개인 약속이 취소되어 두 달간 무증상 자가 격리자가 되었다.

프리랜서 강사인 나는 돌림병의 직격탄을 맞아 폭풍우 치는 바다 위의 요트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직장인을 그만하기로 한 것이 작년 12월이나 올해 1월 정도였다면 내 불운을 원망하며 발악했겠지만

프리랜서 생활 6개월 차에 접어든 이 시점, 퇴사하면 꽃 길을 걸을 것이라며 나를 고무시켰던 타로 상담사만 떠 오른다. 바이러스를 예측하지 못하는 타로 같은 거, 다시 보지 않겠다.


앞날이 어두울 것이 점점 분명해지던 어느 날 맥주를 마시다 불현듯 죄책감이 들었다.

‘일도 하지 않으면서 맥주를 마시다니, 이건 너무 주정뱅이 같잖아.’

맥주를 마시는 건 하루를 마무리하는 세리모니였다. 나보다 직급이 높은 아재들과 언니들 앞에서 ‘업무용 글쓰기’를 강의하며 최소 세 시간, 많게는 여덟 시간 동안의 민망함을 견뎌낸 후, 하루의 보상으로 주어졌을 때 비로소 의미 있다. 일 하지 못하는 자는 마시지도 말자.

나는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다 마셔 치우고 다음날부터 금주했다.


유튜브는 이제 독심술로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

금주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술을 끊었을 때 나타나는 20가지 변화’, ‘금주의 놀라운 효과’ 같은 것을 알려준다는 영상이 줄지어 나타났다. 그 영상에 모르는 정보는 단 하나도 없다는데 내 모든 신발을 걸 수 있었지만 혹시 새로운 연구결과라도 발표되었나 싶어 또 보고 말았다.

‘그걸 꼭 찍어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아느냐.’라는 핀잔을 한 두 번 들어본 것이 아니면서 결국 찍어 먹는다. 역시나 금주에 도전 중인 남녀노소들이 술을 끊으면 살이 빠지고 피부가 좋아지고 숙면할 수 있으며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음주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금주 관련 영상을 몇 개 보았더니 유튜브는 나를 술고래라 판단했는지 알코올 중독 관련 영상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그중에는 알코올 중독 치료과정을 담은 EBS 다큐멘터리도 있었는데 딱 봐도 된장인 것을 알았지만 원래 알던 된장 맛과 어떻게 다른 지 궁금해서 결국 찍어 먹고 말았다. 영상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가족들을 도탄에 빠트리면서도 절대로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빌런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을 하지 않았다.


일이 없어 술을 마시는지 술 때문에 일을 못하는지, 사정이 궁금할 새도 없이 이 시국이 길게 이어져 내 인생 결국 망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잠복기 없는 바이러스처럼 온 정신에 퍼지고 말았다. 술맛이고 밥맛이고 다 떨어진 날이었다. 무노동만큼 해로운 것이 유튜브다. 일 하지 못하는 자는 마시지도 먹지도 말자.


맥주를 안 마신 지 2주째 접어든 어느 날, 집으로 오기로 한 친구를 위해 편의점에서 버드와이저 740ml 캔 세 개를 샀다. 온전히 손님 접대용이었다.

“이 맥주 자주 사시는 분이죠? 저희 가게에서 이건 손님만 사 가시거든요.

안 떨어지게 하려고 꼭 채워 놓고 있어요.”

미니 스톱 마포 한신 점 사장님의 말이 에어 팟을 뚫고 훅 들어온다.

오! 귀신같은 눈썰미!

“아…. 네…. 감사합니다.”

“저희가 감사하지요.”

마스크로 얼굴을 다 가렸는데 인상을 좌우하는 건 결국 눈인가?

나를 위해 맥주를 준비해 놓는 사장님의 친절에 황송하여 금주에 대한 의지가 살짝 흔들릴 뻔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일 하지 못하는 자다.


그 후부터 마포역에서 집으로 갈 때마다 지나쳐야 하는 그 편의점, 매우 신경 쓰인다.

‘나는 당분간 금주인인데 나 때문에 재고가 생기면 어떡하지.’

자영업자 사장님의 재고까지 걱정하는 마음의 여유, 한 달간 금주로 인한 놀라운 효과이다.


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직장인들을 앉혀 놓고 ‘회사에서 글 잘 쓰는 법’이나. ‘회사에서 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을 강의할 때마다 누구나 아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백 개의 칭찬을 들어도 하나의 미지근한 반응에 안절부절 못 할 때는,

‘책 읽고 영화 보고 글 쓰고, ‘업무용 글쓰기’ 말고 ‘재미있는 글쓰기 강의’만 하고 살면 좋겠다.’고 염원했다.

기도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건만 소원이 반이나 이루어졌다.


무증상 자가격리 3개월째, 일이 내게 준 것이 돈 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에게 일은 존재의 증명, 생존신고 같은 것이었다. 두 달간 금주로 좋아하지 않던 밥벌이를 그리워하게 되다니. 유튜브 찍어야겠다.

제목은 ‘프리랜서 강사가 직접 경험하고 알려주는 금주의 또 다른 효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