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사는 J가 근황을 물었다.
대학원 과제하고, 영어 공부하고, 책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린다고 했더니 J는 “작품 활동 안 하는 시기의 연예인이구나.”라고 내 생활을 정리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독립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등장인물 ‘소피(윤승아)’가 그랬기 때문이다. 소피의 직업은 배우이다. 주인공 ‘찬실(강말금)’의 표현에 의하면 소피는 “잘 때 빼고는 다 움직이는 아이”다. 게다가 당장 촬영할 작품이 없어 시간도 많다. 그녀는 프랑스어, 기타, 폴 댄스, 잣 막걸리 담그는 법을 배우러 다닌다. 비수기의 배우는 그렇게 뭔가 배우러 다니나 보다. 배우러 다녀서 배우인가. 소피는 배우는게 너무 많아 수업 일정을 자주 잊어버리지만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 이 시국에는 무엇이든 온라인, 대면 수업은 딱 하나, ‘마카 드로잉’ 수업뿐이다.
7년 전쯤에 홍대에 있는 미술학원에 그림을 배우러 간 적이 있다.
학원 수강 카드의 ‘수강 목적’ 칸에 ‘수채화를 그리고 싶어서’라고 썼는데 선생님은 나를 미대에 보내려고 작정한 듯이 매주 선 긋기 연습만 한 시간을 시켰다. 기초에 건방 떨지 않아야 나중에 실력 발휘가 가능하다는 것은 진리다. 너무 중요한 그 ‘기초’는 너무 쉽고 너무 지겨웠지만 오조오억 개 선 긋기를 하며 ‘수채화 그리는 그 날까지’를 목표로 묵묵히 고양이, 토끼, 코끼리. 독수리, 기린 그림을 모사했다. 그리고 가끔 수선화나 향수병 같은 것도 따라 그렸다.
3개월 정도 지났을 때, 드디어 스테들러 피그먼트 라이너 칼라 펜으로 채색이란 것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학원을 그만두었다. '나는 수채화를 그리고 싶었다고.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야. 이럴 거면 수강 목적은 왜 물어보았던 거냐.', 원망하면서.
3개월 동안 양파만 썰다가 드디어 웍 근처에 갔는데 그 순간 주방을 뛰쳐나온 중화요리 주방장 지망생같았다.
몇 년 사이 성인 미술 수업은 매력적으로 변화 발전했고 두세 시간만에 작품을 한 장 뽑을 수 있는 ‘원 데이 클래스’는 힐링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원하는 도구로 내가 고른 사진을 따라 그림을 그리다 보면 수십 년간 몰랐던 내 재능이 툭 튀어나와 나에게 인증서를 들이미는 것 같다.
“나,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었어?”
“맞아. 너,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었어.”
수업 시간에 그린 그림을 단톡 방에 공유하면 멤버들로부터 칭찬 샤워가 쏟아진다. 이보다 더 큰 힐링이 없다. 원데이 클래스 종류도 다양하다. 수채화는 물론, 색연필로 그리기, 크레파스로 그리기, 펜으로 그리기 등등….
얼마 전, 전 직장 동료 M이 나에게 ‘’ 마카 드로잉’을 권했다.
“언니, 배워보니 너무 재미있어요. 언니도 좋아하고 말걸요!”
워크숍 할 때 쓰는 그 고급 싸인 펜으로도 그림을 그리냐며 흘려 들었는데, M이 마카로 그린 진회색 소파 그림을 보고는 수년간 잠잠했던 미술심이 터지고 말았다. 신속한 채색, 선명한 칼라, 빠른 결과물, 트렌디한 이미지, 얼른 배우고 싶어 조급증을 내던 중, 수업 T.O 나기가 민족 대이동 기간 KTX 취소 표에 버금간다는 실력파 선생님의 수업에 겨우 끼어들 수 있었다.
홍대의 한 카페에서 매주 화요일, 3시간 동안 마카 드로잉을 배운다.
수업에 오는 사람은 다섯 명 내외이고 각자의 진도에 따라 각자의 그림을 그린다. 수업을 시작한 날도, 매주 수업을 마치는 시간도 달라서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이지만 그림 그리는 두 시간 동안은 세상없는 절친이 되어 다양한 화제로 대화를 나눈다.
얼마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코로나 19로 시작됐던 대화가 뜻밖의 국면에 접어든 일이 있었다. 마카 드로잉 선생님이 전해 준 놀라운 뉴스 때문이었다.
“제 친구, 로또 당첨됐데요. 5천만 원. 어제 단톡 방에서 얘기하더라고요. 로또 당첨됐다고.”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로또 당첨 소식에 바쁘게 놀리던 마카를 동시에 멈추었다. 잠시 숨도 멈추었다. 그리고 서로 흔들리는 눈빛을 주고받은 다음 한마음이 되어, 꾸왁! 비명을 질렀다.
탄식과 감탄의 말을 충분히 쏟아낸 후 다시 차분한 마음이 되어 각자의 그림에 눈길을 주었지만…, 눈길만...주었다. 마음을 온통 로또에 빼앗겼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로또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저는 3등 당첨된 적 있어요. 100만 원쯤 받았어요.”
라는 누군가의 고백에는 또 다시 단체로 술렁이며 긴 숨을 토했다. 로또 당첨이 허황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목격하여 있는대로 희망에 찬 우리는 코로나 19가 끝나면 로또 명당을 따라 ‘로또 트립’을 하겠다는 소박한 꿈도 꾸었다. 예전에는 1등에 당첨되고도 관리를 제대로 못해 인생이 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요즘엔 그렇지도 않다며, 뜻밖의 행운을 얻게 되더라도 절대 놀고먹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때 선생님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제 친구는 원래 집도 잘 살거든요.”
그랬다. 부자가 계속 부자인 이유가 있었다. 원래 집이 좀 살았던 선생님의 지인은 부자이면서도 부지런히 로또까지 샀다. 나는 부자도 아닌 주제에 로또를 산 적도 없어서 사람들이 5만원부터 100만원까지 당첨 경험을 이야기할 때도 말 한마디 못하고 감탄만 했던 것이다.
우리는 부자의 습관을 본받아 매주 로또를 한 장씩 '꾸준히' 사자고 다짐했고 이 불안한 시대에 기댈 것은 로또밖에 없다는 말로 결의를 다졌다.
그 날, 생애 첫 로또 구매를 위해 편의점으로 달려갔건만, ‘법에 따라, 로또는 취급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오랜만에 발산된 내 질주본능을 꺾었다. 이 안내문은 거의 모든 편의점에 다 붙어 있었는데 편의점에서 로또를 판매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였지만 나만 몰랐다. 그랬다. 로또는 아무 곳에서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구하기 어려운 것은 마카 드로잉 수업 멤버들과의 비장한 결의 후 이틀이 지나서야 겨우 마포 역 3번 출구 가판점에서 살 수 있었다.
나의 첫 로또는 마카 드로잉 선생님 친구의 5천만 원 당첨 소식과 함께 나에게로 찾아왔다. 그리고 3일 후, 쓰레기봉투로 들어갔다. 짧은 만남이었다. 요즘은 번호를 일일이 맞출 필요도 없이 QR코드로 2초 만에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시간, 단 2초. 그 짧은 순간 로또는, ‘불안한 시대에 단 하나의 의 기댈 곳’에서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로 전락한다.
한 달 동안 로또 세 장을 샀다. 실적은 3전 3패다. 과정부터 결과까지 재미있는 건 하나도 없었던 ‘로또 매주 구매’ 계획은 살포시 포기했다. 포기는 내가 잘 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로또 구매 경험으로 얻은 것은 ‘꼭 당첨될 것이라 생각하고 산 것은 아닌데, 안되면 왜 괜히 실망스럽지?’라는 심리학적 질문과 ‘습관은 역시 무서운 것이다.’라는 뇌과학적 질문이다.
매주 실망하는 것과 매주 규칙적으로 로또를 사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로또 살 돈으로 ‘마카’를 샀다. 행운의 기초를 다지기도 전에 너무 쉽게 포기했나, 잠시 번민했지만 신속하게 실망을 주는 당첨 확률 814만 5천 60분의 1의 로또보다 신속하게 행복감을 주는 완성 확률 1의 마카 드로잉이 미래를 계획하는데 수백 배 도움이 된다.
하....취미생활엔 돈이 너무 든다. 이래저래 부자가 되긴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