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책 교보에는 없던데
제5 공화국 시절 엄마들은 아이에게 한글을 직접 가르쳤다.
제대로 된 교재도 없던 때, 스스로 선생님이 되어 8칸 공책 한 권으로 한글 수업을 했다. 자모음을 가르쳐주고 신속하게 ‘사과, 사자, 호랑이, 나무’ 같은 단어를 써주면 아이가 열 번씩 베껴 쓰면서 외운다. 한글 학습 단계, 어휘 분류에는 전혀 맞지 않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쓰다가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되면 문장 쓰기에 들어간다. 그리고 받아쓰기. 받아쓰기는 필수다.
아이가 제대로 못 쓰면 열불 터져했지만 어려운 받침을 곧잘 생각해 낼 때는 세상 따뜻한 눈빛을 보내며 기특해한다. 얼마 가지 않아 아이는 한글을 다 익힌다. 역시 주입식이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다행이었다. 태국이나 이란에서는 아이들이 어떻게 문맹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때가 되면 대부분이 알게 되는 한글이지만 그때는 한글을 빨리 떼는 것에 집착했다. IQ 테스트 외에 그 어떤 학습 진단도 없던 때에 유일하게 학습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학생의 성적이 오르면 과외선생님의 몸값이 올라가듯 네 살, 다섯 살에 스스로 글자를 읽는 아이는 엄마의 자부심이 되었다. 얼마 동안은 그랬다.
글자를 익힌 아이의 다음 미션은 스스로 책 읽기인데 어느 집 책장에나 꽂혀 있던 전집, “한국 전래동화”, “세계 명작동화”를 다 읽으면 책 읽는 재미, 엄마 기쁘게 하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우리 엄마도 직접 한글을 가르쳤다.
엄마는 내가 되도록이면 빨리 읽고 쓰길 바랐다. 엄마에게는 그래야만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남편에게 딸이 쓴 귀엽고 앙증맞은 편지를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유조선의 선원이었는데 지구를 반 바퀴를 돌며 기름을 실어 오느라 배를 타면 적어도 1년은 배 위에서 생활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완벽히 고립된 바다 위 공간에서 즐길 것이라고는 활자밖에 없었을 아빠에게 딸의 편지는 당연히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5살이 되자마자 한글 떼기 특훈에 돌입했다.
진즉에 “한국 전래 동화” 전집을 들여놓았던 엄마는 글자를 몰라 책을 넘기며 그림만 보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콩쥐팥쥐 이야기 엄청 재미있는 거 알제? 직접 읽으면 더 재밌다. 다른 것도 읽고 싶제?”
동기 부여 좀 할 줄 아는 사람.
특훈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곧 동화책을 읽었다. 그리고 아빠에게 편지도 썼다.
나는 동네에서 한글을 가장 빨리 뗀 아이였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고 세상에, 다섯 살 밖에 안되었는데 아빠한테 편지까지 쓰는 아이가 되었다. 이때 엄마는 혹시 딸이 똑똑한 건 아닌가, 조금 두근거렸을 것이다.
아빠가 회사를 옮기기 전까지 약 12년 간 한 두 달에 한 번 편지를 썼는데 사건이라고는 없는 방학 생활계획표 같은 날들을 보내던 제5 공화국의 어린이는 쓸 말이 없어 편지지 앞에서 자주 울고 싶었다.
“아빠, 난 언제 어른이 되나요”,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건가요.” 같은 질문이라도 하면 좋았겠지만, 왜 그런 것을 물어봤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답장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아빠 보고 싶어요, 아빠가 빨리 집에 왔으면 좋겠어요”, 이런 말들을 주구장창 썼다.
너무나 진심이었다. 하지만 사건 없이 감정만으로 지면을 채우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이미 깨달았다. 편지를 두 장 이상 채우는 때는 뭔가 사건이나 ‘(이야기) 거리’가 있을 때였으니까.
“아빠, 오늘 학교에서 호국보훈의 달 기념 글짓기 상 받았어요. 엄마가 칭찬해 주셨지만 아빠가 함께 있었다면 더 기뻤을 텐데…”
이런 날은 갑자기 의젓해졌고 독자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엄마 아빠와는 평소에 반말하는 사이였지만 편지를 쓸 땐 꼭 높임말을 썼다. 그래야 지면을 더 빨리 채울 수 있었다. 약 15포인트 크기 글씨로 한 장을 못 채우고 편지를 마무리할 때면 엄마로부터 비난이 날아오기도 했다.
“아빠는 식구들 얼굴도 못 보고 멀리서 고생스럽게 일하는데 달랑 한 장 쓰고 마냐….”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 말이 없어 미칠 것 같았다. 아빠가 진짜 듣고 싶었을 일상의 이야기를 썼다면 내 편지들은 귀여운 작품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아빠, 엄마가 덕천 슈퍼에 가서 두부 사 오라고 했는데 너무 가기 싫었어요. 왜 엄마는 자꾸 까먹고 안 사 와서는 맨날 나한테만 시키는지 모르겠어요. 심부름시킬라고 일부러 안 사 오는 걸까요?”
학교 숙제가 점점 많이 지면서 아빠에게 편지 쓰기는 해야 할 일의 순위에서 밀렸다. 엄마의 강요도 어느 순간부터 농도가 옅어졌다. 하지만 가끔은 엄마가 물었다.
“아빠한테 편지 쓸 때 되지 않았나. 아빠가 그렇게 멀리 가 있는데 생각도 안 나나.”
그럴 때면 또 죄책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지 않았다.
편지에는 쓸 수 없는 사연이 차곡차곡 쌓이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