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쩌면 매번 돌아오는 계절 속에서 성장하는 건지도 몰라.
여름의 끝물, 저녁 공기의 서늘함이 마음을 관통할 때, 덜컥 겁이 났다.
공기와 바람, 향기가 지난 가을의 마음을 고스란히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기나긴 폭염 속에서 서늘해진 온도가 반가울 법도 하지만, 일 년 동안 잊힌 것 하나 없이 같은 마음으로
가을을 맞는다는 것이 부끄럽다. 그렇게 가을에 도달하는 것을 미루기 위해 여름으로 도망치듯
일본의 따뜻한 섬, 쨍하게 더운 베트남으로 여행을 했다. 타지에서 여름을 연명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완연한 가을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피할 수 없듯 계절을 미룰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언젠가 이런 식으로 매해 돌아오는 어떤 계절을 두려워한 적이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오래 전 봄에 힘든 이별을 겪은 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어나는 꽃마저
두려워한 적이 있다. 지난 계절에 겪은 마음이 그대로 재현되어 감정의 반복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봄이 두렵지 않다. 이젠 봄의 달콤한 공기가 좋고 피어나는 꽃들을 기다리는 계절이 되었다.
마음이 어지러운 계절에서 황홀한 계절이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이제 봄이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을을 맞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이번 가을은 마음이 불편할지 모르나, 다음 가을엔 괜찮을 수도 있다.
순환하는 계절 속에서 잊고 싶은 감정이 계속 떠오르겠지만, 계절은 선명하게 돌아오고 마음은 흐릿하게 바래진다.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외면했던 마음을 대면하고 언젠가는 덤덤해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하지만,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매번 돌아오는 계절을 겪으며 성장하는 것인지 모른다.
#열다섯 번째 번짐.
쓰다듬고 싶은 모든 순간 _ 민미레터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