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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미 Mar 25. 2020

단 하나의 나로만 살아야 할까?

Q. 사람, 상황 등에 따라 성격이 달라져요. 무엇이 진짜 '나'일까.








낮에 만난 작업실 동료 앞에서의 나와 저녁에 만난 오랜 친구 앞에서의 나, 집에 돌아와 남편 앞에서의 나. 하루 사이에도 상대에 따라  말투와 행동의 차이가 있다. 각각 성격을 다르게 보여준 그들이 만나 ‘나’라는 사람을 얘기할 때 전혀 다른 사람처럼 묘사된다면 내가 어느 한쪽에게 거짓을 보이는 걸까.


상대에 따라 내가 좀 더 보이고 싶은 모습, 혹은 상대가 내게 기대하는 모습을 더 꺼내게 된다. 그것이 가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전혀 없는 성격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성격 중에 좀 더 상대와 잘 어울릴 수 있는 모습을 확대하는 것이니까. 아마 ‘가식’이라면 마음에 힘이 들어가 불편할 테니 본인이 더 잘 알겠지.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만화 등 스토리 속 완벽하게 구상된 캐릭터가 아니다. 성격/심리 테스트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대표적인 성격이 있긴 하지만 그건 내가 가진 성격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지, 반대되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살아오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경험을 통해 수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하나의 성격만 있는 게 더 드문 일 아닐까. '한결같은 사람.' 아마 그게 가능하다면 확고한 기준으로 단일적 성격을 지켜가는 노력이 들어가고 있을 거다. 다른 사람들이 일관된 성격으로 보이는 건, 내가 상대에 따라 보이는 면이 다른 것처럼 나도 그의 단면만 보기 때문일 거다.   


                                           

'나’라는 사람이 단 하나의 성격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나를 덜 미워했을 거다.                                                                                                                                                                                                                                                     
 

규정해둔 ‘나‘와 그렇지 않은 ’내‘가 그렇게 오래 싸우게 두지 않았을 거고, 다양한 모습의 나를 좀 더 일찍 받아들였을 거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 반대되는 행동할 때의 나를,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고, 우리 애가 이런 애가 아닌데." 라고 두둔하듯이 덮어버리곤 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너무 많은 순간의 나를 부정하고 있더라.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은 순한 아이만을 앞으로 떠밀다 등 뒤로 감추던 아이가 튀어나왔을 때, 나는 오랜 시간 그 아이를 미워하고 혼내야 했다. 그 아이도 나라는 걸 잊고.

 

그래서 ‘이런 성격이라~’ 하며 단정 짓고 확신하는 건 조심하려고 한다. 고정된 기준을 자신에게 들이대 나를 좁힐 수도 있고, 상대방의 단면만 보고 쉽게 성격을 결정 내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으니까.                                                                                                                                                                                                                                                        




                                                                                                                                                                                                                                          

취향의 변화와 다양성은 잘 인정하면서
성격의 틀에 있어선 왜 유연하지 못할까.



한낮의 빛 아래, 꽃과 수채화를 좋아하는 내가 있고 한밤중의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내가 있다. 크림치즈 바른 스콘에 향기로운 홍차를 마시는 내가 있고 곱창전골에 소맥을 마시는 나도 있다. 잔잔한 인디 노래를 들으며 고요히 몽상하는 내가 있고 TOP에 드는 힙합 가요를 들으며 어깨를 들썩이는 나도 있듯. 취향을 넘어 성격의 다양함은 존재한다.

문장 하나에도 울음 터지는 감수성 짙은 내가 있는가 하면 남들이 다 울었다는 영화를 덤덤하게 보는 메마른 나도 있다. 인생의 큰 결정을 단번에 내리는 무모한 내가 있는가 하면 오랜 기간 고민하고 준비하는 계획적인 나도 있다. 떼먹힌 알바비에 한마디도 못 하는 소심한 내가 있는가 하면 성추행범 앞에 물을 끼얹는 용감한 나도 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 보는 내가 있고 어쩌라는 식의 멋대로인 나도 있다.


수많은 내가 있다. 아직 30대. 앞으로도 몰랐던 나를 만나게 되겠지. 나와 나 사이 선을 그어두고 어떤 성격이 맞고 틀리는지 평가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해야 '나'다운가 고민하기보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따르며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는 중이다.



우리를 사계절 나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계절처럼  규칙적이고 성실하게 바뀌는 건 아니지만 그때그때 유동적으로 변하는 나무라고 생각할 것.

노래하며 춤추는 여름 나무, 거리를 두고 적막한 겨울나무, 투명하고 향기로운 봄나무, 오늘만 살더라도 화려한 가을 나무.


그 모두가 한 그루의 '나무'인 것처럼.          




                                                                     




당신이 삶을 이끌어가는 모습 그대로 당신은 존재하고, 그렇듯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와는 별개로 감춰지고 개인적이고 더 진짜 자아에 매달리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제임스 힐먼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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