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권정생, 이오덕, 전우익 선생님에 대한 원고를 청탁받았을 때, ‘엥?’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는 이 세 분이 따로따로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분은 권정생 선생님이고, 사실 거의 몰랐던 분은 전우익 선생님이었다. 이오덕 선생님은 전래동화 연구할 때, 입말의 중요성에 대한 저서를 여러 번 읽은 적이 있다.
원래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건 삐딱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지라, 아동문학을 연구하고 쓰는 사람임에도 권정생 선생님에게도 삐딱한 시선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첫 번째 삐딱한 시선은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가 요즘 아이들에게 통해?’ 혹은 ‘요즘 엄마들이 진심으로 강아지똥이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길 원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는 권정생 동화에 나타나는 희생과 고난이 요즘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하는 질문에 다름 아니었다. 아이들은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읽으니까 말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에 나타나는 등장인물들의 심성은 현대의 아이들에게 설득되어지는 심성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오덕 선생님과 전우익 선생님은 조금 달랐다. 이오덕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 주장이 아주 강하다. 들은 바로는 그 강한 주장으로 나중에 외로워지셨다고 하는데, 그런 분이 권정생 선생님의 무덤 옆에 묻히기를 원했을 정도라면, 권정생님은 과연 어떤 분이셨을까?
이번 기회에 전우익 선생님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읽었는데, 자아가 단단하고, 이오덕 선생님처럼 주장이 강하다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공동체와 자연에 대한 시선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이오덕, 전우익 두 분 선생님이 권정생 선생을 사랑하고 아꼈다고 하니 그건 왜일까? 심지어 이오덕 선생님은 권정생의 작품만이 ‘한국 아동문학의 희망’이라며 그것을 지키는 일이 자신의 의무이며 책임이라고 받아들여,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을 알리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두 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정직한 삶, 있는 그대로의 삶을 전하는 것이 아동문학이라고 보았다. 작가가 사는 그 시대와 문화 안에서 벌어지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전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시대와 문화 안에서 살아간다. 코로나가 끝나고, 학교에서 만난 학생들은 코로나 전과 달라졌다. 체격도 달라지고, 태도도 달라졌다. 학생들과 내 나이의 차가 점점 벌어질수록 유전자가 변이된 다른 인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황사의 근원인 중국의 고비사막에서 시작되는 물줄기가 만 번을 꺾어가며 동해에 다다른다는 사자성어를 ‘만절필동’이라고 한다. 사실 여기서 동은 중국의 동해지만, 우리에게서는 서해이다. 같은 바다라 하더라도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동해이기도 하고 서해이기도 하다. 어떤 현상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시대에는 옳았던 것이 다른 시대에는 그렇지 않다.
고비사막에서 시작된 누런 강(황하)이 동해바다(우리에게는 서해바다)에 이르렀다 다시 오츠크해로 흘러가는데, 이때쯤이면 누런색이 아주 짙푸른 색이 된다고 한다. 바다가 깊어져서 그렇기도 할 것이고, 만경창파에 고비사막에서부터 안고 있었던 모래를 마침내 놓아버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모래란 한정된 시대와 문화가 담았던 일시적인 것들이고, 시대와 문화를 관통하는 인류라면 공통적으로 가지는 어떤 것일 것이 만경창파의 깊은 물이라면 틀린 생각일까?
만경창파의 깊은 물, 시대와 문화를 관통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같이 느끼는 것. 몽실언니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에도 공감하는 것. 가뭄에 꽃잎이 마르는 것을 보며 식물과 교감하고 물을 주는 것, 겨우내 굶주릴 새에게 양식과 물을 마련해 주는 것,
이것이 권정생 선생님이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시대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끌어내는 것, 그러기 위해 스스로 고통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삶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전우익 선생님이 말한 재미있는 삶이기도 할 것이다. 혼자만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와 교감하며 사는 삶,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땅과 땅에서 나는 모든 것들도 끌어안고자 하는 노력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에서 나타나 있다. 땅을 건강하게 지키는 것, 씨앗을 맺지 않거나 번식을 하지 않는 식물을 만들어내는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는 것이 다 같이 재미있게 사는 것이라고 책에서는 말한다.
거기서 재미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