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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 Nov 18. 2020

미니멀리스트에게 루틴이 필요한 이유

에너지도 미니멀하기 때문이다

나의 미니멀 라이프 타령은 곤도 마리에의 유명한 격언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와 함께 시작되었다. 왜인지 지금 그녀는 서양인들에게 힐링 크리스탈을 8만원에 파는 봉이 김선달이 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깊은 감명을 받았던 나는 안 입는 옷들을 처분하기 시작. 이제는 어디 가서 '미니멀리스트'라고는 못 해도 '짐이 별로 없어요'라고 말할 정도는 된다. 한 통 반 짜리 옷장에 사계절 옷과 이불이 다 들어가니까. 


집안 곳곳의 물건들을 솎아내면서 깨달았다. 나는 선택지가 많은 것을 의외로 안 좋아한다는 사실을. 예를 들어 가을 옷이 15벌 정도 걸려 있으면 무슨 옷이 있는지 한 눈에 들어오고 '이거랑 이거 입어야겠다' 쉽게 떠오르는데,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매칭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고를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날 수록 오히려 총기를 잃는 기분이랄까. 지하상가에서 쇼핑하는 것을 보물찾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홀로 망망대해에 떨어진 듯 막막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후자가 바로 나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에너지조차 미니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에 충전되는 에너지 양이 있다고 치자. 나의 2년차 아이폰 배터리 최대 성능이 82%인데, 내 에너지의 충전 게이지도 비슷하다. 최대가 100%가 아니고 푸욱 잘 자면 80% 언저리로 충전되어 깨고, 컨디션 안 좋은 날엔 겨울철 아이폰처럼 방전이 잦다. 


에너지야말로 티끌 모아 태산이라, 자잘한 일에 신경 쓰다 보면 한 거 없이 피곤해지기 일쑤다. 그래서 난 미니멀 라이프랑 잘 맞는다. 적은 선택지 안에서 고르고, 치울 필요 없이 비워두는 게 좋다. 요즘엔 하루의 루틴을 정해 시간에 이름을 붙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퇴근 후'라는 시간에 뭘 할지 아무 것도 정해두지 않았더니 선택지가 너무 많은 것만큼이나 헤매게 되더라. 이거 할까, 저거 할까 고민하다가 늘어나는 것은 스크린 타임의 숫자뿐.


약간의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 지난 주부터 종이 신문을 받아보고 있다. 디지털 구독은 안면몰수하기 너무 쉽지만, 종이는 부피를 과시하며 쌓이기 때문에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덕분에 아침 6시에 일어나 1시간 가량 경제신문을 읽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당연히 다 읽진 못 한다. 한 기사 당 2번은 보기 때문에 6면 정도에서 늘 시간이 다 되는데, 그럼 그냥 덮는다. 에너지를 폭발시켜 전력질주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의도적으로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장거리 달리기처럼 질리지 않는 선에서 꾸준히 하는 게 목표다.


에너지 미니멀리스트는 고민뿐 아니라 부담감에도 매우 취약하므로 습관에 단서를 달아주기로 한다. '1시간' 경제신문 읽기, 하루에 딱 '반 장만' 글쓰기 정도로. 그렇다. 오늘이 '반 장만 글쓰기'의 첫 날이다. 난 글 쓸 때 자주 목적지에 늦을까봐 초조해하는 택시 승객처럼 군다. "아, 원고지 16매 언제 다 쓰지?" 그 부담감에 짓눌리는 순간부터 글쓰기가 철인 3종 경기가 된다. 한 번 하고 나면 혀를 내두르며 피하고 싶어지는. 하지만 에이포 반 장은 좀 만만하니까! 이거 봐라. 벌써 반 장을 훌쩍 넘어 한 장이 다 되어간다.  


이런 루틴들을 몇 개 더 만들어 모듈 가구 조립하듯 내게 맞게 '최적화'시키고 싶다. 그래서 내 작고 소중한 에너지를 사사로운 결정보단 무언가를 하는 데 오롯이 집중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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