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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 Nov 20. 2020

문제가 있는 게 디폴트

그러니 반대로 달려도 소용없어

웹툰 작가 이종범은 만화 캐릭터를 만들 때 '이 사람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인가? 두려움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인가?'를 고민한다고 한다. 그동안 재밌게 봤던 드라마나 영화, 만화를 떠올려 보면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야 보는 사람들이 응원할 맛도 나고, 엔딩이 찬란하지 않겠는가.


만약 '나'를 캐릭터화한다면 아주 좀스럽고 재미없는 인물이 탄생할 것이다. 철저히 두려움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제가 생기는 게 싫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전에 심장부터 날뛴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손발이 차게 식는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어?"라는 질문에 "저 때문에요"라고 대답하는 순간이 오는 게 가장 두렵다. 


돌이켜 보면  나의 사회생활은 그 말을 덜 하기 위한 고군분투의 시간이었다. 발행된 기사의 맞춤법을 틀리거나 자료의 출처를 잘못 기입하는 사소한 실수부터 동료와의 트러블까지. 별별 문제의 주인공이 될 때마다 누가 콱 밟고 지나간 캔처럼 자존감이 납작해졌다.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애쓰다보니 절로 꼼꼼해졌고, 가끔은 신경질적인 B사감처럼 굴게 되었다.


올 초에 작은 그룹의 리더 역할을 맡으면서 그런 현상은 더 심해졌다. 하나 하나 내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 번호를 매겨 피드백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길까봐 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소통하다 보면 어떤 방향으로든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결국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문제의 당사자가 됐다. 문제의 문제의 문제. 피할 수 없는 자괴감의 늪.


며칠 전, '픽소'라는 스타트업 대표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문제를 '버그'에 비유했다. 제품에선 코드 버그를 잡고, 조직 문화에 문제가 있으면 컬처 버그를 잡는다고 생각한다고. 이 구절을 읽고 '문제'라는 단어를 '버그'라고 바꿔보았다. 때려 잡으면 되는 '오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동안 무엇을 못했는지 깨달았다. 문제와 나를 분리하지 못했다. 문제가 생긴다는 건 곧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냥 해결책을 찾으면 되는 '버그'일 뿐인데, 나의 인정 욕구가 한낱 버그에 나의 자아까지 도매급으로 팔아넘긴 것이다. 이런 것도 잘 못하는 너는 별로인 사람이라고.


공교롭게 오늘 읽은 마켓컬리 김슬아 대표의 인터뷰에는 "나는 문제는 언제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대목이 등장했다. 두 대표님이 번갈아 나의 뒷통수를 후려치기로 작정한 걸까? 나는 또 하나, 뜯어 고쳐야 하는 생각을 발견했다. 문제가 없는 것을 디폴트로 여기는 사고 방식. 문제를 예상치 못한 변수요, 나를 힘들게 하는 스트레스 요인으로 느끼게 만든 큰 원인 중의 하나였다. 


문제는 원래 있는 것이다. 버그가 나타나면 어떻게 고칠지 고민하고 개선하면 된다. 문제는 그냥 문제다. 내가 아니다. 내 앞에 벌어진 일과 나를 분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문제를 발생시켰다는 이유로 '사람'을 미워하는 실수도 덜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지금이라도 회사 모니터에 붙여둬야겠다. 언젠간 문제 앞에서 좀 더 의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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