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과 사람 사이에도 타이밍이 있다
우중충한 금요일, 퇴근을 하려던 선배가 발길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내 친구가 새로 창업을 했는데, 이제 좀 정리가 됐다고 해서 내일 놀러 가기로 했어. 뭘 선물해주면 좋을까?” 극단적 실용주의자인 나는 “포스기?”라고 대답했고, 당연히 기각당했다.
“너의 앞날이 창창할 거야! 이런 메시지가 막 느껴지는!” 무릇 자영업자에게 가장 기분 좋은 말은 “돈 많이 버세요!”가 아니겠는가. “그럼 돈 많이 들어오라는 의미에서 금전수?” 입 밖으로 내놓고 나니 나도 이제 어엿한 라떼의 대열에 들어섰다는 게 실감 났다. 금전수라니. “오! 돈 들어오는 거 좋다.” 하지만 칭찬을 들으니 금세 텐션이 올라가 다시 조잘조잘 종편 생활정보 프로그램 애청자 같은 소리를 하기에 이르렀으니. “풍수지리에 의하면, 입구 쪽에 황금색 그림을 걸어두면 돈이 많이 들어온대요. 해바라기 그림 많이 걸던데요, 그래서!”
"걔 독실한 크리스천이야.” “아, 넵.”
일을 하던 두 명이 선물 고르기의 대열에 합류했다. 선물 받을 친구가 ‘디자이너’라는 말에 모두가 신중해졌다. “디자이너들은 못 생긴 물건을 용납하지 않는다구.” “맞아, 결국 내가 선물해도 자기 취향 아니면 안 쓰더라.” 고오급 편집 숍에서 파는 예쁜 앞치마, 역시 비싸고 예쁜 계산기, 손을 많이 쓰는 업종이니까 핸드크림 등등 다양한 후보들이 쏟아졌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이니 돼지저금통 안에 돈을 두둑이 담아주라는 의견도 있었다.
나와 A씨는 핸드크림을 밀었다. 손을 제 때 관리해주지 않으면 나중에 습진이 생기거나 너무 건조해져서 고생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B씨가 아주 적절한 반대 의견을 냈다. “안 돼. 음식 하는 손인데 향이 묻으면 안 되지.” “아, 넵...”
결국 선배는 ‘역시 돈인가...’ 아련하게 읊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별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나도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출근길에 읽다 넣어둔 책 <기록의 쓸모>를 다시 펼쳤다. 세 장쯤 읽었을까. 누가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정확히, 필요한 내용이 거기 쓰여있었다
“프릳츠커피컴퍼니 김병기 대표님에게 들은 잊히지 않는 말. 대표님은 본인의 운동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바리스타들에게 딱인 신발입니다.”
바리스타는 계속 서있어야 한다. 그러한 그들에게 편한 운동화라는 뜻이다. 똑같은 신발이라도 자기 직업답게 표현하는 게 참 좋았다.
프릳츠 커피에서는 ‘무향 핸드크림’도 판매하는데, 이 제품을 설명하는 인스타그램 콘텐츠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향이 있는 핸드크림을 쓸 수 없는 직업군의 기술자들을 위하여.”
나는 그 페이지를 바로 사진 찍어 선배에게 보냈다. 우려했던 딱 그 부분을 고려해 만든 제품이라니. 프릳츠니까 디자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선배 집에서 가깝기까지 하다. 곧 답장이 왔다. “오오! 그거군!” 별 거 아니지만 대단한 도움을 준 기분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뿌듯했다. 어떻게 딱 그 자리에 그 문장이 있었을까? 만약 출근길에 그 대목을 읽었다면 별생각 없이 지나쳐 금세 잊었을지도 모른다. ‘선물’이라는 키워드가 뇌리에 남아있을 때 만났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반갑고, 귀하게(?) 쓰인 것이다. 사람과 문장 사이에도 타이밍이 있나 보다.
가끔 어떤 문장과 장면들은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을 해준다. 그게 무향 핸드크림에 대한 정보든, 내 처지에 대한 공감과 위로든, 요즘 계속 고민하고 있었던 문제의 실마리든. 타이밍 좋게 만나 내게 힌트와 감흥을 준 모든 영감들을 나는 그동안 잘도 흘려보냈다. 혼자서 감동하고, 며칠 동안 생각하다가 자연스레 잊어버리는 패턴을 반복했다. 근데 이제는 기억하려 애쓰지 않으면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명실상부 라떼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순간이 오면 기록해보려고 한다. 이렇게, 주절주절 말이다.
이승희 마케터는 알까? 프릳츠 대표에게 영감을 받아 기록한 에피소드가 누군가의 창업 선물 고르기에 도움이 됐다는 걸. 그의 기록이 그를 건너 나에게까지 건너와 쓸모를 다했으니, 책의 이름값을 톡톡히 한 셈이다. ‘기록의 쓸모.’